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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로 떠난 윤정희…대스타답지 않게 소박했던 마지막 길

연합뉴스 입력 01.30.2023 04:57 PM 조회 1,982
장례 마친 백건우, 아내와의 '50년 추억' 어린 식당 찾아
영화배우 윤정희 별세지난 2010년 4월 14일 영화 '시'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1960∼19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끌었던 고(故) 윤정희는 하늘로 가는 마지막 길에 많은 한국인이 아는 예명이 아닌 본명으로 불렸다.


30일(현지시간) 오전 10시 프랑스 파리 외곽 뱅센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하루 전 작고한 고인을 기리며 열린 장례 미사에는 '윤정희'는 없고 '미자'만 있었다.

고인의 본명은 '손미자'이고, 피아니스트 백건우(77)와 1976년 결혼하고 나서 '미자 백'이 됐다. 프랑스에서는 통상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

성당 측은 이날 일정을 안내할 때 '미자 백의 장례 미사'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90분간 이어진 장례 미사에서도 내내 '미자'라는 이름만이 들려왔다.

신부가 장례 미사를 집전할 때도, 사회자가 장례식을 진행할 때도, 고인의 오랜 친구들이 그를 추억할 때도 고인은 오로지 '미자'로 통했다.

한국어보다 프랑스어가 유창한, 고인의 하나뿐인 딸 진희(46) 씨만이 고인을 기리는 추도사에서 고인을 '어머니'라 불렀고, 추도문 제목에는 '엄마'(Oma)라고 적었다.

장례 미사가 열리는 순간만큼은 3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화려한 삶을 살았던 배우의 모습은 없고, 인간 '미자'만 남아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하는 듯했다.

가족장으로 치른 이날 고인의 장례 미사에는 가족, 친지, 지인 등 60여명이 참석하는 데 그쳤다. 성당 안에는 차 있는 좌석보다 비어있는 좌석이 많았다.

고인이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1세대 스타였던 점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먼 파리라 할지라도 영화인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했을 법도 하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유명 영화인은 고인의 마지막 작품 '시'(詩)를 연출한 이창동 감독이 유일했다. 백건우를 비롯한 유족 측이 가족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뜻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례식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성당 안팎에 없었더라면 수많은 히트작을 남기며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의 마지막 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영화배우 윤정희 별세 (서울=연합뉴스) 지난 2011년 4월 6일 프랑스 문화커뮤니케이션부에서 프레데릭 미테랑 문화부 장관으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Officier dans l'ordre des Arts et Lettres)를 수상한 뒤 남편 백건우와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당초 직접 추도사를 낭독할 것으로 알려졌던 남편 백건우는 장례식 내내 말을 아끼며 혼자 슬픔을 삭이는 모습을 보였다. 고인이 어떤 분이었는지 말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은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 같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기도 했다.

평생의 반려이자 후원자였던 고인을 향한 그의 애틋한 마음은 장례식장에 울려 퍼진 진혼곡이 대변하는 것 같았다. 백건우는 수없이 많은 장례용 음악을 새삼 들어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 작품 48에 수록된 일곱 번째 곡 '낙원에서'(in Paradisum)를 골랐다면서 이 곡에는 "천사가 고인을 천국으로 안내한다는 뜻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백건우는 이날 성당 근처 묘지에 있는 납골당에 고인의 유골을 안치하기 전 연합뉴스와 만나 고인의 뜻대로 장례를 조용하게 치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마치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던 '짝'을 잃은 백건우는 이날 오후 4시 안치를 마치고, 50여년 전 고인과 드라마처럼 재회했던 파리의 한 아시아 식당을 찾아갔다.

백건우는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에서 참석했다가 고인을 처음 만났고, 1974년 이 식당에서 고인과 우연히 마주쳐 사랑에 빠졌다.

당시 고인은 한국에서의 뜨거운 인기를 뒤로한 채 영화를 공부하겠다며 파리 유학길에 올랐는데, 마침 그때 파리에 머물고 있던 백건우를 만난 것이었다.

헛헛한 마음에 고인과 추억이 얽힌 장소를 찾았을 백건우의 모습에서 고인에 관해 말을 아끼고 있는 그가 속으로는 얼마나 고인을 그리워하는지가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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