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이란(Iran)은 고대의 파르티아(Parthia) 및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d Persia)왕국의 후예이다.
로마제국 Vs 이란제국의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길었던 분쟁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기원전 54년 카르헤 전투를 시작으로 기원후 628년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최후 전투까지 약 680년의 세월동안 수백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전쟁을 치루며 대립했는데 대부분의 역사 학자들은 원정을 통한 대규모의 전면전만 20회 정도로 분류하고 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현대의 미국- 이란전 양상(비대칭 전술, 지형지물
활용, 강대국의 자존심, 심리전 대결)과 흡사했던 고대 로마-파르티아 전쟁중 첫번째인 카르헤 전투(Battle of Carthage)의 흥미로운 사례들을 함께 나누어 보기로 하자.
로마가 지중해의 동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인 기원전 54년 경, 당시 이란 땅에는 유목민족의 후예인 '파르티아'라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당시, 파르티아는 실크로드의 서쪽 관문을 장악하고 있어 중국과 로마를 비롯한 서방세계를 잇는 중개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한 편,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아르메니아(Armenia)라는 완충 지대이며 전략적 요충 지역이 하나 있었다.
당시 두 강대국 사이의 아르메니아는 "이곳을 차지하는 자가 중동의 패권을 쥔다"고 할 정도로 핵심적인 요새였다고 볼수있겠다.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아르메니아를 장악하면 페르시아의 심장부인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는 고지를 선점하게 된다. 반대로 이곳을 뺏기면 로마의 속주인 시리아와 소아시아(투르키)가 파르티아 기병의 습격에 그대로 노출되게 된다.
한편, 파르티아의 입장에서 보면 험준한 산악 지형의 아르메니아는 자신들의 본토를 보호하는 천연 방어벽이었다. 또한 이곳을 통해 로마의 동부 전선을 우회하여 타격할 수 있는 통로가 될수도 있었다.
이 두 강대국 사이의 아르메니아의 왕가(아르사케스 왕조)는 과거에 파르티아 왕가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파르티아와 가까왔음에도
훗날,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교로 공인(AD 301) 될 정도로, 이미 정서적으로는 로마와 매우 강한 친밀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 정체성' 때문에 아르메니아 내에서도 친로마파와 친파르티아파로 나뉘어 끊임없이 내분이 일어났고, 두 강국은 이를 빌미로 수시로 개입하며 분쟁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여튼, 두 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아르메니아는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전쟁터가 되었고, 평화로울 때는 양국의 외교적 밀당이 벌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66년 경, 결국 아르메니아는 로마에게 패해 로마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때는 기원전 54년, 당시의 로마에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라는 로마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인물이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를 삼분했던 제1차 삼두정치의 핵심 인물이 있었다.
그는 대단히 수완이 좋고 야심에 찬 인물로서 그의 특징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고 전해진다.
로마의 '불타는 부동산 재벌’이라고 불리우는 크라수스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혀를 내두를 만큼 지독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돈을 긁어 모았다.
당시 로마는 화재에 취약했다. 크라수스는 노예들로 구성된 사설 소방대를 조직하여, 불이 나면 먼저 건물주에게 달려가 "지금 이 건물을 나에게 팔지 않으면 불을 꺼주지 않겠다"라는 등의 협박과 회유로 상당한 부동산을 헐값으로 매입을 하여 부자 반열에 올라섰다고 한다.
건물주가 울며 겨자 먹기로 건물을 넘기면 그제야 불을 끄고 건물을 수리해 비싼 임대료를 받아 챙겼다. 이런 식으로 로마 시내의 엄청난 토지들과 건물들의 소유주가 되었다.
훗 날, 권력의 '돈줄'이된 크라수스는 돈은 많았지만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같은 군사적 카리스마는 부족했기에 자신의 약점을 메우기 위해 유망주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후원하기 시작했다.
빚더미에 앉아 있던 젊은 시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후원해준 사람도 바로 크라수스이다. 크라수스의 막대한 자금이 없었다면 카이사르의 정치적 성공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정치적 앙숙이었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를 돈과 인맥으로 조율해 가며 삼두정치를 유지하는 '접착제' 역할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그에게도 군사적 업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를 공포에 떨게 했던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한 지휘관이 크라수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공로도 뒤늦게 도착해 잔당을 소탕한 폼페이우스에게 돌아갔고, 이 사건은 크라수스가 군사적 명예에 집착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크라수스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갈리아 정복 같은 위대한 승리도 없었고, 동방 지역에 관한 아무런 정복의 성과도 없었기에, 그는 마지막 남은 지역인, 실크로드의 관문이며 승리시 전리품이 확실히 보장된 찬란한 땅인 파르티아에 눈독을 들였다.
전공에 대한 욕심으로 60세가 넘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단독으로 파르티아 원정 (카르헤 전투)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파르티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데다 로마는 파르티아와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굳이 전쟁을 벌일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원로원에서는 반대를 했지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찬성에 손을 들어 주면서 우여곡절 끝에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를 손쉬운 상대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세계 최강의 로마군 병력의 모습만 봐도 세상의 모든 적들은 겁을 집어 먹고 항복을 했음에 이들도 역시 쉽게 항복을 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파르티아 정부는 로마로 사절단과 함께 이 전쟁을 막아달라는 서한을 보내왔고 이 사실을 전해듣고 자만심에 부풀어 오른 크라수스는 거만을 떨며 곧바로 시리아로 출병을 하였다.
파르티아 원정(카르헤 전투) 소식을 들은 로마 속국이 된 아르메니아 왕의 "좀 멀긴해도 산맥을 타고 이동하면 적기병에 대한 이점을 얻을수 있다”는 제안을 무시하고, 빠른 진격을 위해 탁 트인 메소포타미아 평원으로 군대를 몰아 평원을 가로지르는 최단 루트를 선택하였다.
한편, 로마군이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파르티아 국왕은 주력부대를 자신이 직접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공격하기로 하고 부관인 수레나스에게 1,000명의 카타프락토이 (긴창으로 무장된 중장기병) 과 9,000명의 궁기병을 주어 10,000여명의 수비병으로 로마군을 방어하라고 지시하였다.
마침내, 중장비로 무장한 약 40,000여명의 로마가 자랑하는 보병 위주의 병력과 긴 창과 활로 무장한 10,000여명의 파르티아 궁기마 병력이 메소포타미아 평원에서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