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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포에니 전쟁

글쓴이: Artchocolate  |  등록일: 10.08.2025 16:53:01  |  조회수: 15
제2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가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놓고 벌인 거대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한니발전쟁’이라고 불릴만큼 카르타고의 천재적인 장군 ‘한니발 바르카’ 와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대결로 압축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자 그러면,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이야기를 계속 나눠 보도록 하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했고 로마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했으며 전쟁에 참가한 다른 나라 용병들의 급료도 지불해야만 했다.

이것은 카르타고에게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하여 급기야 기원전 240년 급료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용병의 반란은 용병의 출신 국가들과 카르타고내의 반 카르타고 세력과 결합하여 거의 3년 4개월을 끌고서야 해결되었는데, 그 와중에 로마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 대한 지배권까지 얻을 수가 있었었다.

한편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바르카는 용병의 반란을 진압하고는 해외로 눈을 돌려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후, 본격적인 히스파니아 식민지 경영에 착수했다.

기원전 228년에는 히스파니아 동남쪽에 '새 카르타고'(현 스페인의 카르타헤나)를 세우고 바르카 가문의 중심지로 삼았다.

한 편, 로마는 시칠리아를 속주로 삼았고 카르타고가 용병 반란을 진압하는데 여념이 없는 동안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카르타고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지중해 서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또한 편, 일리리아의 해적을 소탕하면서 아드리아해로 진출하고 남하하는 켈트인의 침입에 맞서 북이탈리아, 알프스 이남까지 그 영토를 확장 할 수가 있었다.

한 편, 기원전 219년,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의 뒤를 이어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식민지를 운영하던 한니발은 이베리아반도 동쪽 해안에 있는 사군툼을 침공했다.

사군툼은 로마의 동맹국으로, 로마는 한니발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히스파니아 식민지로 자신감을 얻은 카르타고가 이를 거절하자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기원전 218년 5월, 한니발은 보병 4만 명, 기병 8,000명, 전투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로마는 즉시 2개의 군대를 편성하여 시칠리아와 마실리아로 보내 방어막을 형성 했으나, 이를 감파한 한니발은 로마의 허점을 찔러 갈리아 (지금의 남프랑스)를 가로질러 바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침공하였던 것이다.

험준한 알프스를 넘으면서 그의 병력은 보병 2만 명, 기병 6,000명으로 축소될 정도로 힘든 행군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그해 11월 이탈리아에 도착한 한니발은 파죽지세로 로마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볼 것 같으면, 우선 트레비아강에서 벌어진 트레비아 전투에서 기병과 보병이 모두 맞붙었으나 한니발의 전술에 밀려 로마군은 대패를 하고 말았다.

이로써 로마는 알프스 남쪽의 갈리아 지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인 기원전 217년 4월, 에트루리아 지역인 트라시메노호 전투에서도 로마군은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할 정도로 괴멸적 타격을 입고 또다시 패전하게 된다.

이 전투로 로마는 토스카나 지방을 잃으며 공포에 휩싸인다.

로마가 바로 코 앞에 있었지만 한니발은 바로 로마로 쳐들어 가지 않고 로마의 주변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로마의 연합세력을 차례로 로마로부터 분리하여 로마를 고립시키고 최종적으로 로마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으려는 전략이었다.

이에 맞서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하고 한니발과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다니는 지구 전술을 구사했다.

이 전술은 비록 많은 로마인에게 비웃음을 사고 비판을 받았지만 당시의 로마로서는 유효한 전략이었던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기원전 216년 카르타고와 로마군은 칸나이 평원에서 대규모 대전을 벌였다. 한니발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서 자신이 원할 때를 골라 전투를 했고 그리고는 항상 승리했다.

칸나이에서도 일부러 지는 척하다가 자신의 전술상 유리한 칸나이 평원까지 로마군을 끌어들여 싸웠는데 당시의 로마군의 전력은 8만 4천에서 7천 명가량, 한니발의 군대는 5만 가량이었다.

로마군은 이러한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한니발의 전술에 휘말려 괴멸되었다. 이 전투는 포위 섬멸전의 교과서적인 전투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로 손꼽하기도 한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종횡무진 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히스파니아 반도의 또 다른 전선에서는 코르넬리우스 형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한니발의 배후지인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식민도시를 기습하여 처음으로 승리하여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215년, 마침내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카푸아 도시국가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서게 되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도 한니발과 함께 한다는 공동 투쟁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파비우스 전술 체제로 돌입하면서, 한니발과 정면 승부를 피하고 군단을 쪼개어 지구전을 펼치면서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고립시키는 전술을 펼쳐 나갔다.

이때부터 4년간 남부 이탈리아에서 로마군과 한니발은 소모전을 벌였고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 로마는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던 시칠리아와 마케도니아 왕국을 상대로 점차 전세를 역전시켜 나갔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는 아르키메데스의 신무기로 로마군은 고전했지만 기원전 211년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1년여에 걸친 공성전을 끝내고 시라쿠사를 함락시켰다.

또한 캄파니아 지방의 요지인 카푸아는 로마군에 포위되었고 한니발이 구하려 애썼지만 결국 로마군에게 탈환되었다.

이로써 마케도니아 그리고 시칠리아와 캄파니아를 모두 잃은 한니발은 고립에 처하게 되었다.

기원전 209년 이탈리아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전투와는 달리 멀리 히스파니아 전선에서는 26세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가 대담한 전술로 한니발의 근거지인 신 카르타고(카르타고 노바)를 함락시켰다.

이탈리아의 한니발이 로마의 장군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쫓고 쫓기는 상태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중에 히스파니아의 스키피오는 바이쿨라 전투에서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군을 몰아내고 이베리아반도 동쪽 해안에 있는 사군툼을 재탈환하였다.

이에, 하스드루발은 남은 정예 카르타고 군을 모아 기원전 207년 한니발의 알프스 행군 길을 이용해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반도를 내려가 한니발과 합류해 로마를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미리 이 정보를 입수한 로마군 사령관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자신의 구역인 남부 이탈리아를 이탈하여 북쪽으로 이동하여 메타우루스 강둑에서 카르타고군을 물리쳤고 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전사했다.

이듬해에는 지금의 세비야 근처에서 벌어진 일리파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카르타고군을 괴멸시키고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완전히 몰아낼 수가 있었다.

이 후, 스키피오는 이탈리아 에서 발이 묶인 한니발을 아프리카 본국으로 끌어들이기위해 과감하게 카르타고 본토를 침공하기로 마음먹고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한니발은 아프리카의 본국 카르타고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15년만인 기원전 203년에 이탈리아에서 아프리카로 철수하게 된다.

이듬해인 202년 양쪽은, 나라의 운명을 건 결전을 아프리카의 자마 평원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운명적인 최후의 결전, 자마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카르타고군은 보병 4만 6천, 기병이 4천, 전투 코끼리가 80마리였고 로마군은 라일리우스가 좌익,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이 우익을 맡은 기병대 6천을 포함하여 약 4만 명의 병력이었다.

전투의 결과는 스키피오의 승리였다. 한니발은 그의 장기인 기병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생애 첫 패배를 기록하고 카르타고군은 재기불능의 피해를 입게 된다.

결국, 카르타고는 항복을 함으로 모든 해외 영토를 포기하고 더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며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써 로마는 지중해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며 지중해 서부 전체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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