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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유

글쓴이: 허정1  |  등록일: 06.21.2018 22:19:48  |  조회수: 2129
이유야 어찌됐든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해.
내나라가 힘이 없으면 내 의지대로 주권을 보장 할수가 없다는것을 우린 뼈져리게 격었다.

한국전쟁

한국은 전쟁의 당사국인 만큼 이에 대한 서술이 많은 분량으로 되어있다. 많은 교과서에서 이에 대해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금성 교과서와 대안 교과서 중심으로 비교하여 서술하도록 하겠다. 금성 교과서는 7페이지에 걸쳐 6.25 전쟁의 발발, 전개, 결과 그리고 관련 사진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대안 교과서는 12페이지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우선, 금성 교과서에서는 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 상황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남북 사이의 무력 충돌도 적지 않았다. 지리산을 비롯한 남한 곳곳에서도 북한을 지지하는 무장 유격대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38도선 곳곳에는 국군과 북한군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이러한 충돌은 1950년에 들어 줄어들었으나 불안한 정세는 계속되었다.

또한, 전쟁 전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군사력과 무기를 지원했다는 내용을 바로 옆 페이지에 표로 보여줌으로 발발 전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또한 대안교과서에서도 이 상황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미군의 철수 이후 38도선에서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자주 일어났다. 북한이 남침해 올 것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상호 방위조약 체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의 군사 전략적 중요성을 낮게 평가한 미국은 한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요청에 따라 중공군에 편입 되었던 한국인 3개 사단, 약 5만 명을 북한으로 보냈다. 중국의 공산혁명 이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전쟁 전에 남과 북이 대립했다는 내용과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지원을 했다는 내용은 동일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남과 북의 충돌 중에서 금성 교과서는 ‘서로 충돌했다.’고 표기되어 있는 반면, 대안 교과서에서는 ‘일방적인 북한의 도발’이라는 식으로 표기되어있다. 두 교과서 모두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유엔군이 참전했으며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 분량에 대한 차이가 있다. 금성 교과서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한 내용이 4줄에 불과한 반면, 대안교과서에서는 1페이지를 할양하며, 맥아더의 역할과 이승만에 대한 서술을 넣고 있다. 그 이후 정전협상까지의 서술은 양의 차이가 있으나 크게 다른 점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차이는 분명하다. 우선 금성 교과서에서의 전쟁 후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쟁 과정에서 상대방의 편을 들거나 협력 하였다는 이유로 보복이 잇달았다. 전쟁 초 승리를 거둔 북한군은 점령 지역에서 토지 개혁이나 노동 법령의 개정과 같은 북한식 개혁을 하면서, 지주나 공무원 등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하게 되자 반대로 북한군에 협력한 사람들에 대한 처형이 뒤따랐다. 민간인 학살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남한에서는 보도 연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있었고, 경남 거창과 충북 영동의 노근리 등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후퇴하는 북한군도 대전 등지에서 많은 주민을 죽였다. 남과 북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적대감이 쌓여갔다.

금성 교과서에서는 민간인들 학살 내용에 대해 남북군이 진격 한 곳에서 서로 발생했다는 표현을 쓰면서 쌍방의 상황을 썼다. 그러나 그 옆에 보도연맹에 대한 주석을 달면서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에 대한 소개를 강조 시켜 놓았다. 그러나 대안교과서는 보도연맹에 대한 부분은 민간인 학살을 서술하면서 괄호로 ‘보도연맹 사건’이라고 표기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다른 쪽의 민간인 학살에 집중하였다.

1952년 《대한민국 통계 연감》은 전쟁 중에 살해된 민간인이 12만 2,799명이라고 하였다. 그와 별도로 1952년 공보처 통계국은 전재우 중에 북한군과 빨치산에 의해 살해된 공무원과 민간인을 조사하여 《6?25사변 피살자 명부》를 작성하였는데,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과 정부 기록 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것은 한 페이지에 따로 표를 만들어 서술한 북한군의 민간인 학살 내용이다. 이에 사진까지 첨부하여 당시, 북한군이 얼마나 잔혹하게 민간인을 살해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6.25와 관련된 4개국과 북한의 교과서를 살펴 보았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양극체제는 1990년대가 오면서 해소되었다. 필자가 전에도 밝힌 바 있듯이 이제 더이상 이념에 대한 논란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아직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대안 교과서와 금성 교과서가 우파, 좌파로 갈려서 여러 혹평들을 받고 있음을 본다. 이렇듯 과거의 일들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과거의 글, 혹은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영향들을 생각하고, 연구하게 되었을 때 죽어있다고 생각되는 과거의 일은 지금도 호흡하고 있는 산 역사로 우리 앞에 다시 재조명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의 50%가 6.25를 알지 못한다는 설문조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전쟁의 여파는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욱 크게 다가올 것으로 확신한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국가가 같은 과거를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바라보고 있고 교육하고 있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다.
아이들에게 보다 정확한 교육을 하고, 주변국가들의 시선을 정확히 인식했을 때
보다 밝은 미래가 다가올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반복된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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