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대륙의 서쪽 끝자락인 태평양 연안의 캘리포니아에서는 스페인이 서구문명의 개막을 알리며 원주민 인디언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을 무렵 북미 대륙의 반대편에 위치한 동쪽 끝자락인 대서양 연안에서는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알리는 독립 전쟁이라는 또 다른 태동이 일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은,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의 승리로 캐나다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토 등을 새로운 식민지로 확보할 수 있었으나,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해 재정이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영국은 이러한 재정 지출을 식민지에 전가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영국은 설탕법, 1765년 우표법, 톤젠드 조례등을 통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이러한 세금의 부과는 보스턴 차 사건을 불렀으며 결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이 군대를 파견하자 식민지 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이에 맞서게 되었다.
콩코드의 첫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식민지인들은 이 전투에서 93명이 죽고 영국군 8백명 가운데 273명이 죽는 대 승리를 얻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결코 독립을 희망한 것은 아니었다. 충성스런 영국인으로서 진정한 권리를 찾기위한 투쟁일 뿐이었다.
그러나 소수 과격파들이 점차 미국의 독립 문제를 전쟁의 이유로 들고 나왔다.
독립 주장의 선두에는 토마스 페인[Tomas paine]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1776년 1월, 상식이라는 작은 팜플렛에 왜 이 전쟁이 미국의 독립을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혔다.
토마스 페인의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한 <상식> 이라는 책자는 미국인들의 영혼을 일깨웠고 혁명의 방향을 식민지의 권리에서 독립으로 방향의 틀을 바꾸어 놓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국인 누구나 느꼈으나 인정하지 않았던 그것은 바로 독립이었다. 그래서 Continental Party[대륙 회의]는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를 만들기 위한 독립 선언서를 위임 하였으며 벤자민 프랭클린, 로버트 리빙스턴, 로져 셔먼, 토머스 제퍼슨, 죤 애덤스가 작성한 독립선언문(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이 발표된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제정하고 독립전쟁으로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식민지군 사령관에 임명된 조지 워싱턴(George Wathington)이1777년, 델라웨어의 트렌턴 전쟁과 사라토가 전쟁,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자 프랑스를 비롯한 스페인과 네델란드가 미국을 지지하게 되었고 전쟁은 미국의 승리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1781년, 마지막 전투지였던 요크 타운에서 영국군 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전쟁은 마무리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1783년 파리 조약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함으로 세계사에 미국이란 국가가 최초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