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후의 캘리포니아 >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또 다른 싸움은 캘리포니아를 미 합중국의 일원이 되느냐 마느냐로 전국이 시끄러웠다.
당시 미국의 위대한 정치가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는 한 신문의 기고를 통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 삭막하고, 거친 사막의 땅, 모래바람에 쓸려다니는 덤불과 선인장만 있는 지역을 미 합중국에 포함시킨단 말인가!”라고 주장했다.
과거 존 마쉬(john Marsh)와 리처드 헨리 다나(Richard Henry Dana)의 캘리포니아 예찬에도 불구하고 동부의 많은 미국인들은 캘리포니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캘리포니아 내에서도 노예 문제의 찬반이 엇갈려 논쟁을 시작했다.
남 캘리포니아의 정치가들은 노예 제도를 찬성한 반면 북 캘리포니아에서는 반대를 하여 또 다른 갈등을 야기했다.
논쟁은 점점 더 심화되었고 임기 말년의 제임스 포크 대통령도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한 주가 아니라 그냥 서부 지역의 황량한 사막 나라, 캘리포니아 공화국으로 남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때, 이를 뒤집은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황금의 발견이었다.
1848년 1월 24일, 미국과 멕시코간의 전쟁의 종식으로 과달루페 이달고(Guadalupe Hidalgo) 조약을 체결하기 1주일 전에, 제임스 윌슨 마샬(James Wilson Marshall)이라는 목수가 셔터의 명으로 방앗간을 짓기위해 아메리칸 개울을 걷다가 우연히 누런 금속 덩어리 하나를 주웠는데 그것이 바로 황금이었던 것이다.
덤불과 선인장이 뒹구는 황량한 사막에서 황금의 땅이 되어 버린 캘리포니아는 바로 이듬해인 1849년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는데 이들을 가리켜서 퍼리나이너(49er)라고 불렀다.
황금의 땅이 되어버린 캘리포니아는 1850년 한 해에만 50톤의 금을 생산하자 1850년, 9월 9일 캘리포니아는 곧바로 미국의 제 31번 째 주가 되었다.
그 후, 캘리포니아 주는 노예 해방을 찬성하는 주가 되었는데 남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예들이 탈출하여 북 캘리포니아로 가서 자유를 얻는 것에 불만을 품어 노예에 관한 새로운 법을 제정하였다.
그 새로운 법이란 “남 캘리포니아에서 탈출하여 북 캘리포니아로 간 노예들을 북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보호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북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불만이 되었는데 이러한 노예 해방에 관한 문제는 비단 캘리포니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노예 해방에 관한 문제는 미 전국에서 발생되어 결국에는 내전으로 이어지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는 이 노예 해방 법을 시작으로 오늘날 까지도 캘리포니아 주 법은 남가주의 법과 북가주의 법이 다르게 적용된다.
1849년 골드러시로 말미암아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급증하여 1900년에는 1,485,053명이 되었다. 골드러시 이전과 비교하여 졸지에 25배나 증가한 셈이다.
오늘날의 캘리포니아는 미국으로부터 떼어놓는다 해도 세계 10위 내에 드는 풍요로운 주이며 특히 우리가 사는 로스앤젤레스는 미국 전체에서 뉴욕 다음으로 가는 대도시가 되었다.
<작가 후기>
미래가 알고싶다면 과거를 돌아보라는 말이있읍니다.
과거란 바로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2023년 9월 초부터 <명확한 미국의운명- Manifest Destiny>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멕시코 Vs 미국 전쟁 칼럼은 수 많은 영어 자료와 멕시칸 자료를 동시에 검토해 가며 글을 썼는데, 이는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 역사의 사실적인 내용을 독자들에게 바르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 드리며,
새해 복많이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