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전투>
마침내 캘리포니아에서도 전쟁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는데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로스앤젤레스 재탈환을 목표로, 미군은 1846년 10월 8일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랜초 도밍게스(지금의 산페드로 항구에서 12마일 북쪽의 팔로스버디스 인근 야산)에서 캘리포니안 과 미국인 간에 할망구 전투(Old Woman’s Gun)가 벌어졌다.
이 전투의 이름이 할망구 전투인 이유는 열악한 환경의 캘리포니아 방위군은 어느 할망구 집의 정원에서 캐낸 낡은 대포를 전투에 사용해서 이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 전투에서 미군은 6명이 사망했고 캘리포니언은 3명이 사망했다.
로스앤젤레스 재탈환에 실패한 미군은 그 후, 몬테레이 인근의 살리나스 골짜기에서 11월 16일 원주민 목장 전투 (Battle of Rancho Natividad)를 치루었는데 이 전쟁에서도 4~5명의 미군 희생자가 나왔고 3~4명의 캘리포니안 희생자가 나왔다.
그 후, 이듬해인 1847년 1월 2일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산타 클라라(Santa Clara) 전투에서는 미군이 2명의 부상자를 낸 반면 캘리포니아군은 4명의 사망자와 5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당시 1846년 12월 6일, 샌디에고 외곽의 산 파스쿠알(San Pasqual) 골짜기 (지금은 샌디에고 시의 일부가 되어 있다)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커니(Kearny) 장군의 부대와 Gillespie의 부대가 연합 작전을 펴서 산파스쿠알 지역에 주둔해 있던 안드레스 피코(Andres Pico)가 이끄는 93명의 캘리포니아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미군은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21명이 전사자가 나온 반면 캘리포니아 방위군은 사망자는 없고 약간의 부상자만 나온 전투로 기록되었다.
다음날, 커니 장군은 그의 부대를 이끌고 샌디에고로 탈출을 시도하는 도중 캘리포니아 방위군을 발견하여 기습 공격을 가했다. 이 때 캘리포니아 방위군 6명이 전사하고 미군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 군은 뮤힐(Mule Hill)고지 정상에서 부대를 재정비 할 수가 있었으나 고지는 이미 캘리포니아 방위군에 의해 포위가 된 상태였다.
미군은 뮤힐 고지에 고립되어 있었는데 12월 11일,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미 함대 소속의 스톡톤(Stockton) 사령관 휘하부대 215명의 미 해군과 해병 전투 병력이 도착하여 캘리포니아군의 포위를 뚫고 샌디에고로 퇴각할 수가 있었다.
산 파스쿠알 전투라고 명명된 이 전투에서 양 군은 수많은 부상자를 내었는데 미군은 21명의 전사자, 캘리포니아 군은 6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샌디에고로 퇴각한 스톡톤과 커니는 전력을 가다듬고 로스 앤젤레스 재탈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듬 해인 1847년 1월 8일, 그들은 샌디에고를 출발하여 로스 앤젤레스의 남동쪽 지역 (지금의 Fway 60 & 605 코너) 샌가브리엘 골짜기에서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Jose Maria Flores)가 이끄는 500여명의 캘리포니아 방위 병력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두 시간여 지속된 이 전투에서 미군은 2명의 사망자와 8명의 부상자를 내었고 캘리포니아군도 비슷한 손실을 입었었다.
다음날, 미군과 캘리포니아군은 메사 전투(Battle of the Mesa 지금의 로스 앤젤레스 인근의 버논 지역) 에서 다시 만났는데 질레스피를 비롯한 5명의 미군이 부상을 입었고 캘리포니아 군은 1명의 전사자와 30명에서 40명 가량의 부상자를 내었다.
상당한 피해를 입은 캘리포니아 군은 전의를 상실하였고 미군과 캘리포니아군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전쟁은 종식 됐으며 이 메사 전투가 캘리포니아에서는 마지막 전투로 기록 되었다.
메사 전투가 끝난 다음날, 수색대원들을 필두로 미군은 로스앤젤레스로 입성 할 수가 있었고 미국의 성조기도 로스앤젤레스 시에 다시 게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