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몬트 이야기
프레몬트는 그들이 캘리포니아에 온 목적은 캘리포니아 네바다 산맥의 지형을 파악하고 지도를 정확하게 완성하기위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방위군 사령관인 호세 카스트로(Jose Castro)는 프레몬트 대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즉각 군대를 캘리포니아 밖으로 철수 할 것을 명하였다.
프레몬트는 곧바로 그의 탐험 대원을 소집한 후, 다음 작전을 지시했다.
그 해 2월에 캘리포니아의 목장주들은 그들의 목장 말들이 프레몬트의 부하들에 의해 도난당한 것을 알게되어 당국에 신고 하였다.
그러자 프레몬트는 자신의 부하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편지를 목장주들에게 보내는 한 편, 프레몬트 일행은 카스트로의 명령을 무시한 채 캘리포니아 해안가 인근을 떠돌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자기 어머니를 위한 바닷가 별장 부지를 물색하느라 해안가를 돌아다녔노라는 조크를 남기기도 했다.
1846년 3월, 캘리포니아 방위군 사령관 호세 카스트로(Jose Castro)는 멕시코 법을 따르지 않는 미국인 이민자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뭔가 큰일이 닥칠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3월 5일, 카스트로 장군의 최후 통첩이 전달되자 프레몬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피코 가빌란(Pico Gavilan 영어로는 Hawk”s peak 뜻은 매의 부리. 미 캘리포니아 중부의 도시인 San Juan Bautista시의 인근 산)에 요새를 만들고는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당시 캘리포니아 몬테레이에는 토마스 라킨(Thomas O. Rarkin)이라는 미 정부에서 파견된 영사가 있었는데 그의 편지가 프레몬트에게 도착하였다. 내용인즉슨,
“리더인 프레몬트가 미 정부에서 파견됐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당신의 행동은 매우 위험하며 무책임한 행동이다.
우선 당신이 있는 곳은 도시와 인접해 있어서 흥분한 시민들의 단체 행동과 부딪칠 위험이 있으며 캘리포니아군의 대규모 공세가 있을 시에는,
당신들은 살아 남기 힘들 것이며 또한 그 결과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모든 미국 이민자들에게 고스란히 미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프레몬트의 응답은 “라킨이 보내온 편지를 감사히 잘 읽었고, 우리는 이미 카스트로의 군대와 싸울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내용이었다.
“나 자신은 물론 우리 모두 강한 정신력을 갖고있으며 만일 그들이 무분별한 공격을 가해올 시에는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조국과 성조기 아래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카스트로는 200여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매부리 고지에 도착하였다.
미 영사 란킨은 프레몬트에게 전투를 하지 말라는 당부의 메시지를 연속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프레몬트는 아래쪽에 집결한 캘리포니아의 군대와 3문의 대포를 바라보고는 즉각, 부대원들을 대피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3월 9일, 그들은 매부리 고지를 빠져나와 일단 셔터의 요새로 피신하였다.
그는 나중에 자기 아내에게 쓴 편지에 어마어마한 카스트로의 군대가 포위하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퇴각했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결국 카스트로의 요구대로 캘리포니아를 떠나 북쪽의 오레곤주로 부대를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