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몬트 이야기
텍사스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오늘은 캘리포니아 이야기를 해야겠다.
캘리포니아 공화국에 관한 이야기는 <프레몬트>부터 시작된다.
1845년의 어느 날, 당시 존 찰스 프레몬트(John Charles Fremont )대위가 백악관의 초청으로 포크 대통령을 만나고 밀명을 받았을 때는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포크 대통령의 밀명을 받은 프레몬트와 그의 부하들은 세인트루이스에 모여 서부 지역을 향해 출발하였다.
프레몬트의 탐험 목적지는 그레이트 베이진(Great Basin)이라는 로키 산맥과 네바다 산맥의 중간에 있는 사막 지대의 토지측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의 62명의 대원은 토질 측량을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였다는 것과 더군다나 의심스러운 점은 그들이 완전무장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수렵 사냥꾼들과 군인들 그리고 12명의 델라웨어 인디언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그들은 목적지인 그레이트 베이진에 도착하자 소수의 여러 구룹으로 나뉘어져서 네바다 산맥을 넘었다.
12월 10일, 프레몬트와 칼손 그리고 15명의 군인들 그리고 약간의 인디언들이 캘리포니아의 셔터 요새(당시, 캘리포니아에 첫 발을 디딘 유럽인과 미국인 이민자들이 모이는 장소로 훗날, 골드러시의 발상지이다.)에 먼저 도착했다.
이들은 수상쩍은 모습으로 마침내 멕시코 땅인 캘리포니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1845년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는데 그들은 캘리포니아 정부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불법체류 및 불법 점거하는 상태였다.
가톨릭 신자로 전향한 후 멕시코 시민권자가 되어야 자기의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멕시코의 법률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았다.
당시의 주지사였던 -피오피코(pio pico)-는 캘리포니아에 늘어나는 미국인 불법체류자들이 눈에 거슬렸다.
1845년 여름, 피코는 이 같은 미국인 불체자의 침략적인 행위에 대한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그들이 스스로 캘리포니아 밖으로 떠날 것을 공포함과 동시에 미국인 무법자들에 대항해 캘리포니안 스스로가 캘리포니아를 지켜나가자고 역설하였다.
프레몬트 일행이 캘리포니아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미국인 이민자들과 캘리포니아 인들 간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당시, 결성된 캘리포니아 군 사령관은 호세 카스트로(Jose Castro) 장군이었다.
그는 북 캘리포니아의 소노마(Sonoma)에서 미국 이민자들의 반란을 파악하고 캘리포니아 군대를 이동 중에 있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Manifest Destiny”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국민들의 유행어였고 자긍심이었다.
미국의 한 잡지에서 시작된 이 말은 북미 대륙의 미국법은 북미대륙 전체에서 통용된다는 논리로 그 말의 의미는 미국에 존속되면 행복한 삶을 누릴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캘리포니아 미국인 이민자들은 이 말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미국인 이민자들은 멕시코 정부의 이 같은 간섭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프레몬트 일행이 캘리포니아의 셔터 요새에 도착한지 일 개월 후인 1846년 1월에 프레몬트는 몬테레이로 가서 카스트로 장군에게 면회를 신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