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알바라도가 살았던 몬테레이의 주택>
L.A.의 코리아
타운과 다운 타운 사이에 있는 알바라도(Alvarado St.) 거리는 북쪽의 글렌데일 블레바드(Glendale Blvd.)와 만나 2번 프리웨이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후버길(Hoover St.)과 만나면서 끝나는 짧은 길이다.
이 길은 멕시코
시절1838부터 1842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엮임 하였던 후안 바우티스타 발렌틴 알바라도(Juan Bautista
Valentín Alvarado)를 기려서
만든 거리인데, 주지사 알바라도가
살던 시절의 캘리포니아는 정치적, 외교적, 사회적으로 복잡 미묘하고 불안정했으며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캘리포니아 역사적으로
볼 때도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 책 한 권 분량이 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간추려서 4회 분량으로 간략하게 살펴 보기로 하자.
캘리포니아 출신의 알바라도는 스페인 시대인1809년 2월 14일,
알타 캘리포니아의 몬테레이 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알바라도(Francisco Alvarado)가 사망하고 그의 모친 마리아 호세파 바예호(Maria Josefa Vallejo)가 재혼하는 바람에 그는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는 영국인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1827년 그의 나이 18세부터 관청의 비서 직으로 일하며 정치에 관한 실무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 후, 1821년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의 해방 과 더불어 멕시코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1824년에 는 캘리포니아 토지 분배제도법이 확립되고 그리고 1828년에는 미션 소유의 토지가 캘리포니아 주민에게 무상 분배되는 법이 발효되었다.
1833년 새로 임명된 주지사, 호세 루이스 피게로아에 의해 21개의 교회 재산이 분할되어 목장으로 변했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그 해 8월, 교회 재산이18000명의 카톨릭 세례자들에게 이전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수 백만 에이커의 토지가 역시 나뉘어져서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 분배가 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700여 교회 대지가 각기15000에이커씩 분배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알바라도도 1834년 10월 30일 호세 피게로아 주지사로부터 토지를 얻어서 란초 엘 수르[Rancho El Sur] 라는 목장의 소유주가 되었다.
이때부터 캘리포니아에는 목장 주라는 새로운 부류가 각계각층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1835년 피게로아가 사망하자 새로 부임한 주지사
니콜라스 구티에레스 (Nicolas Gutierrez)와 캘리포니아
목장 주들간에 불화가 일기 시작했다.
무상 공급한 땅에 대한 보상으로
멕시코 정부는 캘리포니아의 목장 주들에게 세금을 크게 부과한 것이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멕시코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에
대항하여 알바라도와 카스트로의 주도하에 캘리포니언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아홉 번째 주지사로 파견된 마리아노 치코(Mariano Chico)는 1836년, 주지사 생활 3개월 만에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멕시코로 탈출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