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의 또 다른 싸움>
카팽가 조약으로 캘리포니아의 전투는 종식이 되었지만 스톡턴 해군 사령관과 커니 육군사령관 과의 한판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 되었다.
캘리포니아를 종식시킨 이 시점에서 누가 진정한 사령관인가 하는 쟁점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스톡턴 해군 사령관의 주장에 의하면 캘리포니아의 해방은 커니 부대가 도착하기 전인 1846년 여름에 이미 이루어졌으며 1846년 12월에 발생했던 샌파스쿠알 전투에서 고립되어 있던 커니부대를 구출한 전과를 내세우며 캘리포니아를 정복하는데 있어서 육군 사령관 커니가 한 일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커니 육군 사령관은 사령관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쳤다. 스톡톤 해군 사령관이 1차적으로 로스앤젤레스를 정복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복은 로스앤젤레스를 다시 빼앗김으로서 실패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해군 사령관은 어디까지나 바다에서의 사령관이지 육지에서의 사령관은 아닌 것이다.
어느 전쟁이건 간에 육지에서의 문제는 육군에게 결정권이 있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 두사람의 싸움에 최대의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존 찰스 프레몬트였다.
캘리포니아 정복 후에 해군 사령관 스톡톤과 육군 사령관 커니는 각기 다른 명령을 프레몬트에게 내렸다.
프레몬트는 당연히 지난 여름부터 상관이었고 친분이 있는 해군 사령관의 명령을 따랐다. 스톡톤은 프레몬트를 대령으로 진급 시켜주고 그에게 캘리포니아 주지사 자리도 주었다.
프레몬트는 바라던 대로 캘리포니아의 주지사가 되었다. 이에 커니는 격분하였고 군사재판에 프레몬트를 회부하였다.
불행하게도, 워싱턴에서는 커니 장군의 손을 들어 주었고 프레몬트가 캘리포니아의 주지사가 된지 50일 째가 되었을 때, 1847년 6월의 어느날, 커니 장군의 명령으로 체포영장을 소지한 일단의 헌병들이 주지사 사무실에 들이 닥쳤다.
그들은 명령 불복종에 하극상의 죄를 물어 프레몬트를 체포하였다.
1847년 11월, 워싱턴에서 시작된 그의 군사 재판은 1848년 1월까지 진행되었다. 그의 군사 재판은 메스콤의 집중을 받게 되었고 더군다나 그의 죄상은 반란죄까지 확대되었다.
그는 모든 죄의 유죄를 선고 받고 불명예 전역형을 받았으나, 포크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으며 그의 계급도 종전대로 유지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화가난 프레몬트는 군에 사직서를 제출 하고 말았다.
- 다음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