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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 부상으로 사라진 투수들 ....

글쓴이: 노고지리  |  등록일: 07.01.2016 09:58:32  |  조회수: 1586

 

올해만 벌써 9명의 선발투수를 기용했던 류현진의 소속 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믿고 싶지 않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받았다. 가장 최근 등판에서 6이닝 4실점으로 데뷔전을 치렀던 투수에게 패배를 당했던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가 부상자 명단에 오른 것이다.

커쇼가 이상 증세를 보이며 팀 일정보다 먼저 LA로 간 뒤, 다저스는 일단 급한대로 마이너리그에 있던 유망주 브록 스튜어트를 데뷔시켰다. 하지만 커쇼가 부상자 명단에 들어가게 되면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있던 버드 노리스를 영입하기에 이르렀다.

커쇼는 2014년 호주에서 치렀던 개막전 선발 이후 한 차례 부상자 명단에 오른 바 있다. 1달간 선발 로테이션을 비웠고, 이로 인하여 2014년 27경기 선발 등판에 그치며 200이닝을 넘기지 못했다.

다저스의 전설 쿠팩스, 만 30세에 선수생활 접다

다저스는 뉴욕 브루클린 시절부터 구단 역사를 시작했던 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다. 특히 LA로 연고지를 옮긴 이후 리그에 이름을 남겼던 투수들이 적지 않았다. 연고지를 옮기기 전후 다저스의 최고 에이스는 샌디 쿠팩스였다.

1935년생으로 현재까지 살아 있으며, 다저스 왼손 투수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쿠팩스는 1955년 브루클린 시절부터 다저스에서 활동했다. 12시즌 165승 87패 평균 자책점 2.76에 2396탈삼진을 기록했던 쿠팩스는 1962년 다저스 스타디움이 개장한 이후 최고의 시절을 보냈다.

1963년 25승에 1점 대 평균 자책점 그리고 300탈삼진을 돌파하며 역사상 최초의 만장일치 사이 영 상을 수상하며 화려한 에이스로 군림했던 쿠팩스였다. 하지만 그는 전성기를 보냈던 시절 내내 부상과 싸워야만 했다.

1962년에는 시즌 초 타구에 왼손을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동맥에 이상이 생겼고, 1964년부터는 팔꿈치 통증으로 시즌 내내 코티존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럼에도 쿠팩스는 3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에 만장일치 사이 영 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팔꿈치 관절염에 인대까지 파열되었던 쿠팩스는 만 30세의 나이로 선수 생명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에는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면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치료법이 없었다. 훗날 최초로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던 토미 존이 활약하기 전의 시대였다.

발렌수엘라와 허샤이저... 부상으로 사라진 다저스의 에이스들

쿠팩스의 뒤를 이었던 다저스의 에이스는 1980년대 활약했던 멕시코 출신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였다. 쿠팩스의 주무기가 속구와 커브였다면, 발렌수엘라의 주무기는 현재는 거의 던지는 투수가 없다는 스크류볼이었다.

스크류볼을 지나치게 많이 던지면 팔이 안으로 구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비틀리는 후유증이 생긴다. 발렌수엘라도 코팩스에 ?지 않은 혹사를 거쳤다. 발렌수엘라는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하게 신인상과 사이 영 상을 동시에 수상한 선수일 정도로 위력적이었지만,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1991년 다저스에서 방출됐다.

이후 저니맨으로 1990년대를 보낸 발렌수엘라는 1996년을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사라졌다. 이후 팔을 심하게 비트는 스크류볼을 던지는 투수는 더 이상 메이저리그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스크류볼과 비슷한 궤적으로 변형된 보다 안전한 구종이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주무기 서클 체인지업이다.

발렌수엘라가 사라진 뒤 다저스의 에이스는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멘토로도 알려졌던 오렐 허샤이저이다. 허샤이저는 땅볼 유도형 구질로 각광받는 투심 패스트볼과 싱커를 주로 활용했다. 허샤이저는 쿠팩스와 원투 펀치를 이뤘던 돈 드라이스데일이 갖고 있던 연속 무실점 기록을 깨뜨리며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5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웠다.

허샤이저는 1988년 23승 8패 평균 자책점 2.26으로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이후 2011년 커쇼가 생애 첫 사이영 상을 받을 때까지 다저스는 사이 영 상 선발투수를 배출하지 못했다(2003년 에릭 가니에는 마무리투수로 수상). 허샤이저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1988년은 다저스의 마지막 월드 챔피언 등극 시즌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샤이저는 이후 어깨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고, 1994년 박찬호가 입단했던 해를 마지막으로 다저스를 떠났다. 1995년 클리브랜드 인디언스에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를 따냈다. 양대리그 CS MVP는 허샤이저가 최초였다. 이후 다시 평범한 투수가 된 허샤이저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뉴욕 메츠 그리고 다저스(마이너 계약)를 거쳐 은퇴했다.

다저스가 놓친 에이스, "외계인" 페드로

이후 다저스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형제 투수를 한 팀에 데리고 있었다. 라몬 마르티네스와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그들이었다. 동생 페드로는 잠재성을 보였으나 작은 키에서 던지는 위력적인 속구 때문에 부상 위험성이 노출된다며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저스가 1990년대 가장 실수한 트레이드가 되었다. 엑스포스로 이적한 페드로는 이후 풀 타임 선발투수가 되면서 1997년 17승 8패 평균 자책점 1.90으로 생애 첫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하면서 페드로의 불꽃같은 전성기가 만들어졌다.

페드로는 이후 1999년과 2000년 2년 연속으로 만장일치 사이 영 상 수상에 성공했다. 이 시기는 메이저리그 투수들 평균 자책점이 4.86과 4.91로 극강의 타고투저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2.04와 1.74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고, 이리하여 "외계인"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하지만 페드로도 결국 잔부상을 안고 뛰는 선수였다. 5선발 시스템에서 선발투수가 연 평균 33경기를 선발로 등판하는 점을 감안하면 페드로의 연 평균 등판 횟수는 30경기 정도였다. 2004년 레드삭스에서 밤비노의 저주가 풀리자, 레드삭스는 FA가 된 페드로를 잡지 않았다.

메츠로 이적한 페드로는 2005년만 풀 타임으로 활약한 뒤, 2006년부터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잠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후 그를 찾아주는 팀이 없었던 탓에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2015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페드로는 명예의 전당 입성에 성공했다.

전설이 된 동생 페드로와 달리 형 라몬은 1998년까지 다저스에 남았다. 그러는 동안 다저스는 아시아 시장에 투자하여 박찬호(1994년)와 노모 히데오(1995년)를 영입,  이후 라몬은 설 자리를 잃었다. 라몬은 동생 페드로가 있던 레드삭스에서 2년 동안 뛰기도 했으나 2001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코리안 특급도 피해가지 못한 부상, 붙잡지 않은 다저스

1990년대 후반 다저스를 이끌었던 선발투수는 아시아에서 온 박찬호와 노모였다. 1995년 내셔널리그 신인상을 수상했던 노모도, 1996년 스윙맨을 거쳐 1997년부터 풀 타임 선발투수가 되었던 박찬호도 각자의 등판일에 위력적인 모습을 선보이며 다저스는 아시아에서 많은 팬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모는 과격하게 허리를 비트는 투구 폼으로 인하여 1998년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다저스와의 계약이 끝난 이후 매년 팀을 바꾸는 저니맨 신세가 됐다. 이후 2002년부터 3년 동안 다시 다저스에서 뛰긴 했으나 2004년 극도의 부진을 보인 끝에 방출 당했고, 이후 2008년을 끝으로 123승을 거둔 채 메이저리그 생활을 접었다.

노모가 떠난 이후 다저스는 FA 시장에서 케빈 브라운을 영입했다. 브라운은 슬라이더, 체인지업, 싱커, 스플리터 등의 조합으로 땅볼 유도 구질들을 주로 던지는 투수였다. 다만 구위가 위력적인 탓에 땅볼보다 삼진 비율이 높았고, 2001년 각종 잔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하며 내리막을 걸었다. 브라운은 이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여 초라한 경력만 남긴 채 은퇴했다.

노모가 일본에서 프로 시절을 거친 뒤 다저스와 계약했고, 브라운이 FA 시장에서 영입한 투수였던 것과는 달리, 박찬호는 대학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었던 선수였다. 그리고 박찬호는 FA 자격을 얻기 직전인 2001년 시즌까지 다저스에서 활약했다.

박찬호는 1998년 처음으로 200이닝을 던진 뒤 병역 문제 해결을 위해 방콕 아시안 게임까지 참가하느라 과부하 후유증으로 1999년에 한시적인 부진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켰던 박찬호는 2000년과 2001년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2001년에는 부상에 시달린 브라운을 대신하여 개막전 선발로 등판했으며, 올스타 게임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박찬호는 2001년 후반기부터 불안한 조짐을 보였다. 당시 허리에 통증이 있었지만 심한 문제가 아니라며 등판을 강행했고, 결국 1승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시즌 최종전까지 무리한 등판을 강행했다가 오히려 배리 본즈에게 당시 시즌 71호, 72호 홈런을 허용하여 신기록을 만들어준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6500만 달러 계약을 체결한 뒤 다저스가 박찬호를 붙잡지 않았던 원인들 중 하나가 드러나고 말았다. 2002년 레인저스 첫 해에 햄스트링을 시작으로 각종 잔부상으로 인하여 규정 이닝 진입에 실패했던 박찬호는 결국 허리 부상으로 인하여 2003년 시즌 대부분을 날린 뒤 2004년 후반기에 돌아왔다.

이후 2005년과 2006년 전반기까지 박찬호는 건강하게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FA를 앞두고 2006년 후반기 장 출혈로 전력을 이탈하면서 2007년 메이저리그 1경기 등판에 그쳤고, 2008년 다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로스터에 합류하여 겨우 재기할 수 있었다.

부상으로 사라진 빌링슬리, 건강하게 커쇼와 함께 뛰었더라면

박찬호를 마지막으로 다저스는 한동안 위력적인 프랜차이즈 선발투수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다 2006년 6월 오른손 투수 채드 빌링슬리가 데뷔했다. 공교롭게 당시 선발 로테이션에 있었던 한국인 투수 서재응(현 SBS스포츠 해설위원)이 빌링슬리 데뷔 이후 불펜으로 밀려났다가 역시 주전 포수에서 밀린 디오너 나바로와 함께 탬파베이 데빌레이스(현 탬파베이 레이스)로 트레이드됐다.

당시만 해도 빌링슬리의 선발 로테이션 진입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FA로 영입했던 베테랑 제이슨 슈미트가 부상으로 드러눕는 바람에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8년 여름에는 드디어 커쇼가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빌링슬리와 커쇼는 건강하게 자신의 로테이션을 소화했다. 커쇼는 본격적인 풀 타임 선발 시즌을 시작한 2009년부터 3점 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한 시즌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위력적인 에이스로 성장했으며, 빌링슬리 역시 유망주 시절의 기대치는 아니지만 꾸준히 로테이션을 지켜주는 한 축이었다.

하지만 빌링슬리는 2012년 후반기 팔꿈치 인대에 문제가 생기면서 팔꿈치에 혈장 주사를 맞고 재활을 시도했다. 하지만 빌링슬리는 결국 수술 없는 재활에 실패하고 2013년 토미 존 서저리를 받으며 사실상의 다저스 생활을 마감하게 됐다. 이후 빌링슬리는 필리스와 계약했고, 어깨 등 잔부상을 안은 채 선발투수로 활약하고는 있다.

커쇼와 류현진에게 달린 다저스 투수 계보

커쇼는 2011년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완벽한 투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1년을 시작으로 2014년까지 4년 연속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들 중 가장 낮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한 투수가 바로 커쇼였다.

이 기간 커쇼는 너클볼 투수 R.A. 디키가 20승을 거뒀던 2012년을 뺀 나머지 3년 동안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을 독식했고, 2013년부터는 1점 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는 보다 진화된 시즌을 보내기 시작했다. 2015년에는 개인 첫 300탈삼진 시즌을 만드는 등 더 압도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월드 챔피언에 타는 목마름을 호소하던 다저스는 커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2012년 여름 대형 웨이버 트레이드를 통하여 우승 청부사 조시 베켓을 영입했다. 베켓은 2003년 월드 시리즈 MVP로 플로리다 말린스(현 마이애미 말린스)를 월드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2007년에도 레드삭스에서 ALCS MVP를 차지하며 포스트 시즌 4전 전승으로 월드 챔피언을 이끌었던 청부사였다.

2012년 시즌이 종료된 뒤에는 FA 시장에서 잭 그레인키(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영입했으며, 아시아 포스팅 시스템에서도 KBO리그 최고의 에이스였던 류현진을 영입했다. 사이 영 상 수상자 2명에 포스트 시즌에 강한 에이스 그리고 KBO리그 최고의 에이스 등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가득 채운 다저스는 2013년 월드 챔피언에 가뿐히 올라 설 듯했다.

하지만 베켓은 2003년 갈비뼈 부상으로 시즌을 거의 날렸으며, 노 히터 게임을 만든 시즌 2014년에도 엉덩이 부상으로 후반기에 로테이션을 이탈했다. 정작 베켓은 다저스에 이적한 이후 자신의 강점인 포스트 시즌에서의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하고 은퇴했다.

베켓을 데리고 있었지만 쓸 수 없었던 다저스는 결국 커쇼와 그레인키 그리고 류현진의 원투쓰리 펀치로만 포스트 시즌에 나섰다. 만년 하위권 팀에서만 뛰어서 포스트 시즌 기회가 많지 않았던 그레인키와 류현진은 포스트 시즌에서 나름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커쇼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만 2년 동안 4전 전패를 당하며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2015년에는 류현진이 어깨 관절와순 손상으로 인하여 관절경 수술을 받았고,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렸다. 그리고 그레인키는 시즌이 끝난 뒤 옵트 아웃을 행사하며 다저스를 떠났다. 결국 다저스의 미래는 메이저리그 에이스 커쇼와 KBO리그 에이스였던 류현진 둘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2016년, 류현진은 어깨 부상 후유증을 털어내고 재활 등판을 거쳐 이제 한 번의 재활 등판만을 남겨두고 있다. 류현진이 마지막 재활 등판에서 예정된 갯수의 투구를 건강하게 끝낼 경우 올스타 게임 이전에 다저스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타이밍에 커쇼가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비록 같은 팀의 브렛 앤더슨처럼 수술이 필요한 정도의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일단 전반기 안에 돌아올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팬 투표를 통해 내셔널리그 투수 올스타에 선정되더라도 커쇼는 허리를 위해 올스타 게임 출전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다저스가 급히 영입한 노리스가 선발로 등판할 경우, 다저스는 올해에만 벌써 10명의 선발투수를 기용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다저스의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고 있는 선수는 경험은 풍부하지만 경기 내용이 불안한 왼손 베테랑 스캇 카즈미어, 일본인 투수 마에다 겐타만이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머지 자리는 알렉스 우드(DL), 마이크 볼싱어(마이너 옵션), 로스 스트리플링(마이너 옵션), 훌리오 유리아스(루키), 브록 스튜어트(루키) 등으로 돌려막기를 해 온 상태다. 커쇼의 부상이 장기화되지 않아 후반기에 돌아온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장기화 될 경우 다저스는 사실상 올 시즌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만일 커쇼가 올 시즌을 전부 날리게 될 경우 후반기에 류현진과 브랜든 맥카시가 일단 건강함을 보여주면서 숨을 고른 뒤 커쇼가 건강하게 돌아올 내년을 기약하는 시나리오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수술 소견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커쇼는 당분간 안정을 취할 전망이다.

현재 다저스 부상자 명단에 있는 선발투수들만으로도 로테이션을 짤 수도 있는 상황이다. 커쇼와 류현진, 맥카시와 앤더슨 그리고 우드까지 총 5명은 당초 올해 기존 선발진이 모두 건강했을 경우 구성할 수 있었던 로테이션이었다. 류현진의 복귀가 가까워지고 있던 상황에서 큰 암초를 만난 다저스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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