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을 떠난지 20여년이 지나 들려온 소식은 간암에 결렸다는 남편의 소식이었습니다. 그저 모른척 지나치려고 해도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한창 아빠가 필요한 그때에 우리 곁을 떠나 이제 들려온 소식은 암에 결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몇일을 망설이다가 세아이들을 불러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빠가 암에 결렸다는데 아빠를 보러가야하지 않겠니..
또 아빠가 너희들한테 할 말이 있을 것이고 너희들도 아빠한테 할 말이 있을텐데 이제 모두 털어내 놓고와라. 그리고 다음날 두 딸은 서울로 아빠를 보러갔습니다. 수술이 잘되었다며 일주일만에 두 딸은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우리 네 식구는 다시 작은 일에 순종하며 맡겨진 자기 일에 충실하게 아주 평범한 가운데 지냈는데.. 또다시 들려온 남편의 소식은 간암 수술이 잘됐다고 하더니 또다시 폐암으로 전위가 되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혹은 6개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상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같이 살아본지도 오래된 세월이었는데 핏줄은 할 수 없구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애들에게 얘기했습니다. 한국보다 미국이 더 치료하기 좋고 약도 좋고 너희들이 다 여기에 있는데 뭘 걱정해.. 빨리 빨리 서둘러서 아빠를 모셔와라.
미국이 다 치료해줄테니까. 그리고 엄마와는 상관없이 너희들 아빠니까 마음에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 아빠를 돌봐드려라..라는 내말이 떨어지자마자 막내딸은 아무 불평도 없이 다음날 서울로 아빠를 모시러 갔습니다. 아빠를 만난 다음날부터 그동안 병원에 다녔던 모든 기록과 지금 현재까지 어떻게 치료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모든 기록을 가지고 일주일만에 아빠와 함께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일주일동안 아들과 큰딸은 아파트를 구했고 어떤 병원으로 갈것인지도 미리미리 다 알아놓았습니다. 그렇게 노름이 좋아 아들 딸 마누라 다 버리고 다니더니 이제 병이 드니 형제들도 서로 몰라라하는 신세라니.. 이제 아파트도 병원도 다 정해졌습니다. 아들이 걱정스럽게 물어왔습니다. ‘엄마, 아빠 먹을 음식만 해줄 수 있어요?’ ‘응, 그래 걱정하지마. 남도 해먹이는데 너네 아빠 왜 안해주겠니. 그건 걱정하지마라.’ 참으로 아이들이 다 장성해 제자리로 갈려고 할 때에 병이 들어온 아빠를 가족이라고 받아들이는 내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면서 괘씸하기도 했습니다.
옛날말에 실컷 나돌아다니다가 죽을때 찾아온다더니 우리 꼴이 꼭 그 꼴이었습니다. 많은 주위의 사람들이 남편 받아줄거냐는 물음에 나는 숨도 쉬지않고 NO!!. 끔찍한 얘기하지 말어! 단호하게 짤랐습니다. 가족을 돌아보지않고 저 혼자 잘 산다고 떵떵대던 남편.. 뭐가 그리도 오매불망 그리워했다고.. 남편은 미국에 도착한지 3일만에 입원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죽이며 먹고싶어하는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친정엄마가 만들어줬던 평양식 주먹 만두가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뭐든 먹고싶다는 것은 요구대로 해줬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기도 하기가 싫었다는 것이 정확한 내 맘이었습니다. 남편을 살려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새벽예배를 나가도 그저 의무적으로 형식적으로만 기도했으니까요.. 그럴때마다 내 마음가운데에서는 너무나 무관심하는구나.. 하는 마음의울림이 나를 너무나 많이 괴롭혔습니다. 나는 성전문을 나서며 내가 너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 같아 제일 좋아하는 주먹 만두국과 동그랑땡 등 음식을 해가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병실 바닥에 앉아있던 내 아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남편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그 눈빛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오싹함을 느끼며 난 병실에 들어온 이상 남편을 위호하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름이 끼치고 다리가 떨리는 순간이였지만 내 감정을 꾹 눌러참고 남편을 향해 ‘지금 뭐하고 있는거예요? 내 세 아이들 얼마나 바쁜 아이들인지 알아요? 나도 애들 잘보지 못하는데 빨리 건강해져서 렌이, 크리스틴 결혼할 때 힘이 좀 되줘요. 죠이스 결혼할 때 나혼자 너무 힘들었으니까..’
난 일방적으로 내 말만 따다딱 하고 병실을 나왔습니다. 마치 내가 병원에 온것만으로 내 할일을 다한 것 같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내 마음은 가벼울 것 같았는데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은 더욱더 무거웠습니다. 아이들한테는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뭐든지 아빠가 원하는대로 불편하지 않게 아끼지말고 대해줘라 하면서 나는 뒷전에 앉아 아이들에게 책임을 다 맡겼는데도 마음은 계속 불편했습니다. 새벽예배를 나가도 따뜻한 마음도 , 아니 미지근한 마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조차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강단을 향해 십자가만 물끄러미 쳐다보며 하나님 아버지 나 정말 싫어요 나 정말 그 인간 만나기 싫어요 하나님 나 정말정말 싫어요.. 이렇게 매일같이 몸부림치며 원통해하며 괴로워하는 나에게 아들은 아빠 구원에 대한 문제를 물었습니다.
나는 ‘응, 너네 아빠 예수 믿었으니까 구원의 확신은 있을거야’ 아들의 물음에 나는 무관심히 대답했습니다. ‘엄마, 우리 천국에 가면 아빠도 있어야하잖아요’ 밤을 새워가며 아빠 걱정을 하며 눈물 지으며 ‘엄마, 아빠를 잘아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엄마지요. 엄마 밖에는 아빠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털어낼 사람이 누구겠어요..’ 내가 그동안 아빠한테 구원에 대해 물을때마다 교회에 집사였는데 하고만 대답했다며 아들이 울며 아빠가 구원 받지않고 죽으면 너무 불쌍하잖아요. ‘엄마, 엄마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전도도 하고 많은 일을 했으면서 왜 아빠한테는 뭇해주는 거예요?’ 아들의 질문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같이 남편집으로 예배를 보러갔습니다.
위로는 하나님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고 땅에서는 나를 쳐다보는 내 자식들이 너무도 무서워 예배를 보러갔습니다. 남편집에 가서도 남편이 내 옆에 앉을까봐 혹시라도 내 몸에 손이라도 댈까봐 아이들 눈치를 보며 가정 예배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먼저 기도를 시작하면 남편을 중간에 기도시키고 마무리는 아들이나 딸들이 하는 식으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도 남편의 병은 이제 의사 손에서는 더이상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의사 선생님들도 참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암이 폐를 다 뒤집어 씌었는데도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고 필요할 때 우리 가족을 떠난 남편을 위해 무슨 기도를 해야한단 말인가 몸부림치는 내게 ‘네 마음을 다 내려놓으라’는 마음의 울림이 또 들려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내려놓을 것도, 쥔 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 나 정말 아파요. 나 정말 마음이 아파서 못견디겠어요.’ 가슴을 움켜쥐고 눈물을 토해낼때 또다시 나의 마음에 큰 울림이 왔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방심하는구나. 네 마음을 비워라.’ 그 이후 강권적으로 나에게 내 마음속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긍휼의 마음을 주셔서 남편의 음식을 가져가는 것만이 아니라 남편에게 손수 음식을 먹여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으로바꿔주셨습니다. 참으로 몸부림치며 많은 눈물로 회개하게 하셨고 참으로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깊은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하자.. 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실천하며 남편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무개씨 힘내야지’.. 나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남편 온몸에 붙어있던 살덩어리들은 어디갔는지 어느새 몸은 온통 뼈 뿐이었습니다. 날마다 남편에 대해 깊은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세 아이들과 나는 아빠의 마지막이될 크리스마스 준비에 바빴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내드려야하는 이를 기쁘게 보내드리기 위해 남편의 형제들과 내 아이들이 모두 함께 모여 힘들었던 세월을 뒤로하고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선물들을 예쁘게 포장했습니다. 남편이 뒷마당에 들어서면 볼 수 있게 하늘의 별처럼 작은 불빛과 모닥불도 켜놓았습니다. 남편은 뒷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보내고 날마다 아이들과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남편을 1월1일 .. 아들과 사위, 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만날때 다시 만날때 그때까지 주님 곁으로 보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