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정 "열심히 해도 설 자리가 없어 힘들었다"

글쓴이: 케세라세라  |  등록일: 02.19.2016 14:04:47  |  조회수: 3217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황석정(45)도 오래, 자주 보면 더 매력 있는 배우다. 1992년 한양대 출신을 중심으로 출범한 극단 한양 레퍼토리에 들어가며 연기를 시작한 황석정. 연기한 지 20년의 세월이 훌쩍 넘어 비로소 영롱한 빛을 보고 있다. 단역부터 시작해 힘든 무명 세월이 꽤 길었지만, 연기는 도를 깨우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왔다. "도대체 연기의 끝에 뭐가 있나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도 있었다.

황석정이 얼굴을 알린 건 2014년 방영된 tvN '미생'의 힘이 컸다. 원작 웹툰과 100% 싱크로율을 자랑한 그의 외모와 연기에 대중들의 시선이 단박에 집중됐다. 이어 MBC '그녀는 예뻤다'에서 "모스트스럽게"와 "맘마미아"를 외치며 개성 넘치는 화려한 비주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디까지가 애드리브인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능청스러운 연기는 그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MBC '나 혼자 산다'에서 보여준 여배우의 민낯과 생활, 영화 '더 폰'에서 보여준 의리파 캐릭터 등도 인상적이었다.

황석정은 올해 충무로에서 그 상승세를 이어간다. 지난해 매니저도 없이 전남 고흥과 서울을 힘들게 오가며 찍었던 영화 '순정'으로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체력적으로는 고단했지만, 따뜻한 울림이 있는 영화고,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 심적으로는 힐링을 했다는 황석정. 건조한 현대사회에 잔잔한 따뜻함을 선사하는 '순정'을 위해 "개인적인 얘기를 너무 많이 하고 싶지 않다"던 그가 마음을 돌려 취중토크 자리에 앉았다.

-평소 영화를 잘 안보는 편이라고 들었어요.

"좀 거리를 두고 싶었어요. '고양이를 부탁해'(2001)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영화를 했는데 여배우로서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그때 당시엔 한국 영화 부흥기라 다양한 소재의 영화가 있었거든요.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없어지더라고요.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없었어요. 수많은 오디션을 통해서 아주 단역부터 시작해서 조연까지 했는데 그다음에 가면 또 '누구세요?' 그러더라고요. 남성 위주의 영화만 남았죠. 열심히 했는데도 설 자리가 없어서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한국 영화를 안 보기 시작했어요. 보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았어요."

-절친인 배우 이정은 씨와 여배우가 느끼는 고충을 많이 공감하고 공유할 것 같아요.

"아픈 건 서로 얘기를 안 해요. 말을 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잖아요. 이렇게 힘든데 살아남은 것에 대해 대견하고 자랑스러워해요.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은 것 같아요. 일을 계속하고 있는 여배우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많이 참았을까'에 대해 이해해요.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기여하고 싶어요. 여자 캐릭터도 다양해지고 사회적 편견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것도 화제였죠.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다니는 걸 보고 놀랐어요.

"가져갈 게 없어요. 하하하하. (최근에 이사를 했는데) 지금도 안 잠그고 다녀요. 개인 연습실이 작게 하나 있는데 연습실은 아예 열쇠가 없어요. 동네 사람들 아무나 와서 탁구도 치고 이용하라고 열어뒀어요."

-궂은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 도와주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다들 짧게 만난 사이도 아니고 오래된 사이예요. 오랫동안 서로 존중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서로 양보하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런 귀한 사이가 되는 것 같아요. '네가 있어서 정말 고맙다' 이런 사이 있잖아요.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 어떻게 함부로 살겠어요. 그래서 외로워요.(웃음) 방종을 좀 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까요."

-얼굴이 알려진 뒤 불편하거나 상처받는 일도 많아졌을 것 같아요. 악플도 그 중 하나일테고요.

"하지도 않은 것에 관한 얘기나 공격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럴 때 이런 생각을 해요. 날 돌아봤을 때 나 역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나, 남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 적이 없었나를 생각하죠. 남의 모습을 통해 날 봐요. 하지만 저도 남 욕도 하고, 거짓말도 했거든요. 그럼 또 상대가 그러는 게 이해가 돼요. 힘들어지는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전 개인적으로 어떠한 한 기준의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넌 내 남자친구니깐, 남편이니깐 나한테 이렇게 해줘야 한다고 상대에게 기대하고 그 기준을 들이밀면 서로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악플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그런 계기로 오히려 제 자신을 돌아보니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없어지더라고요."


-힘든 무명 세월을 지내면서 연기의 끈을 놓지 않았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뭐가 있나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옆에 있는 좋은 사람들 덕분이죠. 사람은 좋은 사람이 없으면 못 해요. 내겐 가족보다는 열심히 사는 선배들과 선한 사람들이 원동력이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저를 살아가게 해준 것 같아요. 사람은 절대 혼자 살 수 없어요."

-지금의 배우 황석정을 있게 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미생'이나 '그녀는 예뻤다'처럼 존재감을 많이 알리게된 작품을 꼽겠지만 전 좀 달라요. KBS 4부작 드라마 '아들을 위하여'가 생각이 많이 나요. 영화는 '정글쥬스'요. 가족처럼 지냈어요. 그래서 잊을 수가 없어요. 배우들과 지금 만나도 똑같아요. 그때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하나가 된 것처럼 느끼면서 한 작품이 큰 에너지가 되는 것 같아요. KBS 드라마 '비밀'은 원래 2~3회 나오는 역할이었는데 끝까지 나왔어요. 분량이 늘어났죠. '비밀'을 통해서 좀 더 많이 알려지게 됐어요. 고마운 작품이에요."

-살면서 순정을 바친 순간이나 작품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연극 '바보 각시'를 할 때였던 것 같아요. 근데 매번 무슨 영화든, 드라마든 순정을 바치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연기가 뛰어난 게 아니라서 해낼 수가 없어요. 그렇게 순정을 바친다고 다 잘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를 잘 알고 잘 펼치고 통제해야 하는 직업인데 자기가 자기를 잘 알기가 어디 쉽나요. 실패하면서 제 자신을 알아가는 거죠."

-작년 시상식에서 베스트 조연상(연기)과 버라이어티부문 우수상(예능)을 받았어요.

"기대한 것도 아니고 의도한 것도 아니에요. 기대한 게 아니라서 '뭐지?' 이런 생각도 들어요. 기대를 안 하면 '어?' 이렇게 되거든요. 제가 요즘 '상승세'라고 많은 분이 그러는데 제가 보기엔 그렇게 잘하는 것 같지 않아요. 괴로움이 더 커요. 제 사진을 돌아볼 때 즐겁고 자랑스럽지만은 않아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제 자신한테 떳떳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랑을 주시는 것에 대해선 정말 감사해요."

-차기작을 안 물어볼 수가 없네요.

"KBS 새 월화극 '동네변호사 조들호'에 들어가요. 촬영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어요. 박신양 씨가 서민 쪽에 서서 활약하는 변호사 조들호로 나와요. 불법 비리가 있는 거대 세력과 맞서 싸우는 역할인데 드라마에서라도 그렇게 해줘서 다행이에요. 그런 드라마를 한다는 것이 기뻐요. 전 강력부 형사 출신인데 조들호의 검사 시절 그를 보좌하던 검찰 수사관이에요. 조들호를 언제나 도와주고 싶어 하는 의리 넘치는 사람이에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사람은 자기를 돕고 남을 돕기 위해 태어난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시간을 준다면 어떤 걸 가장 하고 싶은가요.

"어디 편한 곳에 가서 편한 친구랑 한잔하고 흐뭇해져서 잠 좀 실컷 자고 싶어요. 그게 최고로 행복할 것 같아요. '내일은 좀 건전한 생각으로 의미 있게 살자. 하지만 오늘은 좀 쉬자!' 이런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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