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답이 맞는 거요

글쓴이: 한마당  |  등록일: 03.24.2022 17:27:54  |  조회수: 454
정반합-정반합-정반합

헤겔의 변증법이론이란,결국 인간의 문명을 발전시키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답(答)을 구하는 숙제를 하는 투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쉽게 설명을 하면,  서양 역사학자 토인비의 도전(挑戰)과 응전(應戰)과  우리 역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의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鬪爭)이라고 하는 역사의 이론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어느 철학자가 쓴 글을 정중히 모셔 왔습니다.

  ◆ 변증법이란?
  우리는 왜 수백 년 전, 심지어는 수천 년 전의 철학을 지금도 읽는 것일까? 어제의 학문이 내일이 되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빛의 속도로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쏟아지는 이 시대에 철학은 왜 흘러간 옛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르는가? 예전의 철학자들이 지금의 철학자보다 훨씬 더 뛰어났기 때문에? 아니면 철학은 유효기간이 워낙 길기 때문에?

  계몽 시대의 끝자락에 위치한 근대철학의 막내이며 동시에 근대의 불안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탈근대철학의 맏형으로도 평가되는 [게오르게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과거의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철학자다. 그는 철학 역사 연구를 철학함의 핵심으로 여긴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헤겔은 생각을 움직이는 운동으로 본다. 생각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죽은 유물이 아니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움직인다. 헤겔에게 철학적 사유는 살아 움직이는 생각의 운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은 처음에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새로운 생각이 나타나면서 처음의 생각은 이전과 같은 유동성을 상실한다. 생각이 굳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새로 등장한 생각 안에 녹아 있을 따름이다. 이 같은 과정은 생각이 운동하는 한 계속 반복된다. 따라서 지금 우리 생각은 생각의 전체 운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 과정이 철학의 역사에서 끝없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변증법이다.

  헤겔의 생각대로라면 과거의 철학은 책 속에서 활자로 죽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살아있다. 다만 최초의 활발한 유동성을 잃어버리고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철학의 임무는 과거의 생각을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처럼 잘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생각을 현재의 생각 속으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에 놓여있는 팽팽한 길항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좀 딱딱한 철학용어로 표현한다면 생각을 현재화(Vergegenwärtigung)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만약 이런 작업이 없다면 과거는 현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미 흘러간 시대의 유물이 되거나, 또는 시간의 질서에서 벗어난 몰역사적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철학은 사상으로 파악된 그 시대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철학은 과연 한 시대를 사상으로 움켜잡을 수 있는가? 헤겔은 그렇다고 본다.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가 변증법이다.

  헤겔 변증법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간단치 않다. 흔히 알려진 변증법의 3단계 도식, 곧 정명제(These)와 반명제(Antithese), 그리고 종합명제(Synthese), 또는 정-반-합으로 변증법을 설명하는 도식이 머리에 쏙 들어오기는 하지만, 사실 이 도식은 헤겔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난해한 헤겔 철학을 솜씨 있게 푼 하인리히 모리츠 살리베우스(Heinrich Moritz Chalybäus, 1796-1862)의 주해에 등장한다.

  헤겔 철학의 출발점은 칸트에서 시작한다. 근대 독일 관념론 철학이 대부분 그렇지만 헤겔 철학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철학 용어도 칸트 철학에서 차용한 말이다. 헤겔은 단지 그 말에 새로운 뜻을 보탰을 뿐이다. 변증법이라는 말도 그렇다. 칸트는 인간 이성이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오류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변증법(더 정확하게는 선험적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하나의 명제와 그 명제를 부정하는 반명제가 모두 증명이 된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논리학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이 난감한 사태는 도대체 왜 일어났는가? 칸트가 내린 결론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제약적으로 사용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이 무비판적으로 사용될 때, 이렇게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경고 메시지를 변증법 분석을 통해 던진 것이다.
 
  헤겔 철학은 칸트가 멈추어 선 곳에서 출발한다. 헤겔은 칸트가 건너지 말아야 할 곳이라고 선언한 금단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그 넘어서지 말아야 할 곳으로 뛰어넘는 지렛대가 헤겔 변증법이다. 이렇게 변증법을 바라보는 칸트와 헤겔의 시선은 정반대로 향한다. 칸트에게 변증법은 멈추어 서야 하는 빨간 신호등이었다면, 헤겔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은 미지의 땅으로 인도하는 안내등이었던 셈이다.

  헤겔이 칸트 철학에 대해 가진 불만은 “내용과는 관계가 없는 단순한 주관적인 (평면적)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칸트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객관의 경험적 내용을 주관의 형식으로 환원하는 ‘선험적 환원’이 헤겔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형식적이었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 철학을 형식주의 또는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비판하고, 주관적 관념론을 뛰어넘어 객관적 관념론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절대적 관념론으로 향해서 나아간다. 이 절대적 관념론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객관과 주관이 서로 교호하는, 또는 상호 매개되어 있다고 보는 변증법이다.

  헤겔 철학은 체계적이다. 철학사가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촌평을 빌면 헤겔이 만든 체계는 너무나 거대해서 헤겔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두 번 다시는 없을 만큼 방대하다. 동의한다. 이렇게 방대한 철학 체계를 구축한 철학자는 헤겔 이전에는 고대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헤겔 이후에는 그처럼 거대한 철학 체계를 구축한 철학자는 없었고,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우리에게 남긴 지적 유산은 그가 구축한 거대한 철학체계가 아니라 그 체계를 만들기 위해 동원된 변증법이라는 기술이다. 이 변증법적 기술은 정반합이라는 잘 정돈된 형식으로 암기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또 이런저런 사례에 일반화해서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은 내용과 형식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 함께 동행하기 때문이다.

  헤겔이 말하는 논리학은 사실의 내용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생각하는 방식을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 류의 형식 논리학이 아니다. 헤겔의 논리학은 변증법에 따라 자기 본질을 스스로 사유하는 정신의 체계를 다룬다. 그의 표현을 빌면 “스스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an und für sich) 있는 이념을 다루는 분야가 논리학이다. 그래서 그는 논리학을 ‘순수한 이성의 체계’, 또는 ‘순수한 사유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이 왕국에서 진리는 스스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 
  헤겔의 논리학은 올바르게 생각하는 방식 또는 규칙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것은 그가 논리학을 셋으로 구분하고, 각각에 존재의 논리학과 본질의 논리학, 그리고 개념의 논리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헤겔은 개념의 논리학을 주관적 논리학, 그리고 존재의 논리학과 본질의 논리학을 객관적 논리학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객관적 논리학은 주관적 논리학보다 더 높은 위상을 갖는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객관적 논리학은 ‘세계에 관한 학문적 건축물’로, 이것은 오로지 사상을 통해서만 세워진다고 말한다.

  잠깐! 이게 논리학인가? 어느 사이에 우리는 생각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것은 논리학의 영역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닌가? 맞다. 헤겔 철학에서 논리학은 생각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를 다룬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양자를 총괄한다. 헤겔 철학에서는 생각과 존재의 구분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생각의 범주를 뛰어넘어 존재의 세계에도 적용되는 원리다. 이 존재의 세계에는 당연히 자연도 포함된다. 그런데 그게 묘하다. 헤겔이 보는 자연은 이념이 달리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용어로 말하면 ‘Andersein’, 곧 ‘다른 존재’다.

  자연은 로고스(logos)가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기억하는가? 우리는 [철학의 숲] 헤라이클레리토스 편에서 이 고대 철학자의 핵심 주장을 로고스로 파악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만물의 변화를 주관하는 원리는 로고스였다. 만물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은 단지 일회성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로고스가 동행한다. 헤겔 철학은 어떤 점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에 변증법이라는 옷을 입힌 것이다. 헤겔 스스로도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1백 개가 넘는 짤막한 문장에서 자신의 논리학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우리는 또 헤라클레이토스 편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이 원시 기독교의 로고스 사상과 이어진다는 단서를 포착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독교 성서 [요한복음] 첫 대목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에서 ‘말씀’은 바로 로고스를 가리킨다. 헤겔은 기독교적 전통에 바탕을 둔 로고스 개념을 통해 자연철학의 원리를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로고스는 자연 안에서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그의 철학 용어로 풀면 자연은 로고스가 외화한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로고스의 빛, 곧 진정한 존재인 이념의 빛이 자신을 드러낸 결과로 해석한다. 또 우리는 로고스의 빛을 통해서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튀빙겐 신학대에서 그의 친구인 철학자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시인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과 함께 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는 헤겔은 하느님의 이념은 주관과 정신이 되기 위해 다른 존재(Andersein, 자연)를 스스로부터 내보냈다가 다시 스스로 안으로 돌아오게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념은 스스로 자신을 파악하면서 다른 존재에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정신철학의 주제다. 뒤집어서 말하면 자연의 목표는 스스로를 죽여서 외면성에서 벗어나 정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헤겔은 그 단계를 역시 셋으로 구분한다. 주관적 정신, 객관적 정신, 그리고 절대정신이 그것이다. 정신은 개별 인간에게는 주관적 정신으로 나타나지만, 역사 속에 있는 인간 공동체에서는 객관적 정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절대정신으로 자신을 완성한다. 이렇게 정신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여러 단계를 설명한 것이 헤겔이 예나(Jena) 대학에서 나폴레옹의 진군을 보면서 마지막 장을 썼다는 그의 주저 [정신현상학]이다.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오래된 철학 책을 들추어보는가 하는 간단한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모든 생각은 살아 움직이는 운동이며, 우리는 그 운동 과정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당대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헤겔의 응답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변증법이라고 부르는 생성의 철학으로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역사성을 중시한 철학자라는 점을 확인한다. 

  그는 [정신현상학]에서 그의 시대를 ‘새로운 시대’, 또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규정한다. 오늘의 시대를 새로운 시대 또는 과도기로 규정하는 탈근대 철학과 닮은꼴이다. 또 이성의 변증법적 자기 전개가 사회와 역사에 항상 매개되어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그의 철학은 이성의 역사적 사회적 제약을 강조하는 탈근대 철학과 또 닮았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그를 탈근대적 사유를 하는 최초의 철학자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헤겔 철학의 목표인 절대 정신의 자기완성은 근대 세계의 완성이기도 하다. 그는 그것을 역사의 종언, 곧 역사의 최종 완성이라고 부른다. 역사의 종언은 헤겔의 생전에도 또 그의 사후에도 근대의 기획을 완성하고자 하는 모든 이의 꿈이었다. 헤겔 자신은 역사의 최종 완성 단계를 그의 철학을 국가철학으로 공인한 프로이센으로 상정했지만, 그의 사후에도 헤겔 좌파와 헤겔 우파로 각각 나뉜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이 프로젝트는 끈질기게 추진되었다. 이 점에서 헤겔은 부인할 수 없는 근대의 아들이기도 하다.

*글 정재영 / 철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2,30대에 언론사 기자를 지냈다. 나이 40에 늦깎이 유학생으로 영국에 건너가 워릭대에서 사회 존재와 인간의 이해에 대한 리얼리즘 접근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양평에 있는 대부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철학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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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한마당  03.24.2022 17:48:00  

    어쩌면,리마르크의 용블용설(用不用說)에 더 가까울 수 있겠다.
    *라마르크주의
    Jean-Baptiste de Lamarck.jpg
    용불용설(用不用說, 영어: Lamarckism, Lamarckian inheritance, theory of use and disuse)은 장바티스트 라마르크가 제안한 진화생물학 이론이다. 생물이 살아있는 동안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획득한 형질(획득 형질)이 다음 세대에 유전되어 진화가 일어난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