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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황금기는 언제였을까?

라인과 순수의 시대
1950~60년대 / 미국 / 테일핀카

20세기의 전설적인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Less is More. Less, but Better”란 말을 남겼다. 이는 오늘날 모더니즘의 명제나 마찬가지다.

그는 디자인에 있어 덜어낸 것의 미덕을 거듭 강조했다. 미국의 ‘테일핀카’는 정확히 그 대척점에 있다. 테일핀카는 1950~60년대 미국에서 생산된 테일핀(Tail Fin)이 들어간 자동차들을 편의상 아우른 말이다.

디자이너 할리 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미국 록히드 마틴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에서 영감을 받아 자동차에 테일핀을 넣었고 곧 큰 반향을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50년대 초는 유럽이 전쟁에서 회복하는 데 여념 없는 사이  미국과 소련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시기였다. 의전차 수준으로 큰 차체와 크롬 장식의 호화로운 디자인, V8 이상의 고배기량 엔진을 갖춘 테일핀카는 미국의 번영과 풍요의 시대가 빚어낸 궁사극치의 창작품이었다.

미국의 럭셔리카들은 이 조형미 넘치는 테일핀이 마치 승전의 트로피라도 되는 듯 자가복제했고 테일핀은 당대 미국 럭셔리카의 상징이 됐다. 1959년식 캐딜락 엘도라도에서 화려함은 정점을 찍었다.

지나치게 과장된 파스텔컬러의 도장과 주얼리처럼 휘감은 크롬 도금, 금방이라도 발사될 것 같은 로켓 모양의 테일핀.

특히 핑크색 외장을 두른 엘도라도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핑크 캐디’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애정한 차로도 알려진 핑크 캐디는 당시 미국에서 새롭게 떠오른 계급인 ‘신흥 문화귀족’의 전유물이자 상징이었다. 부를 갖춘 젊은 플레이보이들.

말하자면 1950~60년대의 테일핀카는 기능주의에 위배되는 과도함, 기술과 미의 꼭짓점을 좇는 충동이 응집된 결과물이었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세계 복식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1930년대에는 투피스나 팬츠 위주의 실용적이면서 단조로운 여성복이 주를 이뤘다. 당시 샤넬은 여성복에 직선적이고 기능적인 남성복의 요소를 도입해 기존 관습을 전복했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마침내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과거의 풍만하고 로맨틱한 라인에 향수를 느꼈다. 1947년,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을 시작으로 지방시, 발렌시아가 등 유럽 전역의 패션 하우스에서 글래머러스한 여성복이 잇따라 부활했다.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가고 치마는 풍성하게 부풀린 A라인, 어깨를 부풀리고 허리부터 치마 끝까지 타이트한 Y라인 등 현대 여성 패션의 기틀을 마련한 실루엣의 대부분이 이때 정립됐다. 바야흐로 ‘라인의 르네상스’다.

1950~60년대 유럽의 패션과 미국의 테일핀카에는 여러모로 공통점이 있다. 외적으로 직선과 곡선을 절묘하게 섞은 조형미가 그렇다. 나는 엘도라도의 날카로운 테일핀이나 우아한 크롬 머플러가 패션의 실루엣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국적이 다른 두 개의 사건을 연관 짓는 건 일견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유럽은 전쟁과, 미국은 경제 위기와 작별했다. 둘은 그간 짓눌렸던 욕망의 분출이자 낭만의 시절로 회귀하려는 몸부림과 같았다.

물론 여성의 허리를 다시 졸라맨 라인의 시대나 환경에 방만한 자동차는 문제적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떠나 둘의 미적, 역사적 가치만큼은 유효하다.

때때로 고매한 인격과 우아한 삶의 태도를 강요하는 분위기에 숨이 막힌다. 자유롭게 욕망하고 처절하게 망가지는 것 또한 사람의 몫이다. 라인의 시대와 테일핀카는 상상의 황금향인 엘도라도처럼 나에겐 몇 번이라도 복기하고 싶은 황금기이자 신기루다.


세기말 속 퓨처리즘

1980년대 / 유럽 / 콘셉트·슈퍼카

우리의 상상이 정사각형 도트에 불과하던 시절, 그러니까 디지털 개념이 태동하던 1970, 80년대에는 전위적인 콘셉트가 대거 등장했다. 콘셉트니까 급진적일 수 있다지만, 당시 등장한 콘셉트들은 새로운 개념인 디지털을 자동차에 담았다는 점에서 황금기라 하겠다.

자동차가 이동수단에서 움직이는 컴퓨터로 업그레이드되었으니 말이다. 30년이 넘은 지금 보면 80년대의 그린 콘셉트들이 유치해 보이지만, 몇몇 자동차는 세련됨이 느껴진다.

<초전자 바이오맨>의 헬멧처럼 생긴 오르빗은 1986년 이탈리아 튜린 모터쇼에서 폭스바겐이 공개한 콘셉트카다. 오르빗은 은색 해치백 형태로 헤드램프와 리어램프 등 모든 램프는 차체에 얇고 길게 박혔고, 짧고 가파른 보닛은 앞유리와 일직선을 이뤘다.

앞유리는 천장까지 이어지는데 정확히는 B필러까지 하나의 유리로 보인다. 측면까지 감싸는 곡면의 리어 윈도도 신선하다. 실내는 더 급진적이다. 운전석부터 조수석까지 이어진 계기반은 거대한 스크린이며, 자동차 상태를 알 수 있는 그래픽과 속도, 내비게이션 모니터 등 주행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그래픽처럼 표현했다.

하지만 화면 전환이 안 되고, 컴퓨터 그래픽을 흉내만 내다 보니 계기반이 복잡해졌다. 오르빗의 이란성 쌍둥이인 마키모토도 있는데, 골프 2보다 조금 더 긴 차체에 6개의 시트가 장착됐다.

지붕이 없다는 점을 빼면 형태는 오르빗과 거의 동일하다. 헬멧 벗은 바이오맨 같달까.
80년대에는 은색 차체에 각진 선과 네모난 램프를 장착한 콘셉트가 퓨처리즘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영화 <백투더퓨처>로 잘 알려진 드로이안 DMC-12는 포르쉐 대항마로 등장한 아일랜드산 스포츠카지만, 은색 차체와 각진 면들의 집합, 걸윙도어라는 점에서 80년대 퓨처리즘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이 콘셉트들의 또 다른 특집은 컴퓨터 그래픽을 실내에 차용한 것이다.

센터페시아에 모니터를 달거나, 계기반에 아날로그 대신 디지털 속도계를 넣는 식이었다. 속도나 게이지 등의 표시는 작은 액정 화면으로 표현했다. 액정 화면에 자동차 모양의 그림을 새기기도 했고, 다양한 기능을 자잘한 버튼들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다. 전위적인 디자인은 스포츠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기의 이동을 우아한 곡선으로 표현하던 스포츠카들이 직선을 사용했다. 1970년대 등장한 람보르기니 쿤타치가 대표 격이다.

사각 면이 두드러진 쿤타치는 도트로 표현하기 쉬운 디자인이라 도스 게임에 자주 등장했다. 페라리 역시 우아한 보디에 네모난 도트를 더했다. 동그랗게 치켜뜬 헤드램프 대신 각진 헤드램프를 반듯하게 접어 보디에 넣은 288GTO와 F40 역시 레이싱 게임의 단골 차량이었다.

미래를 전위적으로 표현한 것은 자동차만은 아니다. 영화, TV, 만화 등 대다수의 매체는 급진적인 미래를 그려야만 했다. 상상의 기저에 기대와 불안이 혼재했기 때문이다. 80년대 첨단기술을 발판으로 급부상한 경제대국 일본은 서방세계에 동경의 대상인 동시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고, 세계 경제는 유가에 휘둘렸으며 정치는 냉전에 휩싸였다.

이러한 소식이 컬러 TV에서 자동화 기계, 컴퓨터 프로그래밍 광고 이후 뉴스에서 다뤄졌다. 사람들에게 21세기는 막연한 동시에 불안했고, 세기말은 디스토피아의 다른 말이었다. <블레이드 러너> <아키라> 등 인간성에 대한 물음을 제시한 SF 작품이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 시기에 인기를 끈 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이보그의 위협이 < 로보캅>처럼 당장 우리 동네 도로에 나타날 것 같았지만, 컴퓨터가 그릴 수 있는 미래는 겨우 조악한 도트 그래픽에 불과했다. 영화와 달리 당시 컴퓨터는 현실 문제를 해결해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빈약했다.

그럼에도 불안한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환상이 필요했기에 그 역할을 자동차 산업이 채우려 했을 수도 있다. 스크린 속의 미래가 아닌 눈앞에 실재하는 미래, 만지고 움직일 수 있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자 80년대 콘셉트들은 전위적이어야만 했다.


자동차의 레트로

1970년대 / 유럽, 미국 / 소형 해치백

자동차 역사에서 1970년대는 변혁의 시기다. 두 차례 오일쇼크가 많은 걸 바꿔놓았다. 끝없이 팽창하던 과시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껏 키운 차체와 무지막지한 고배기량 엔진은 설 곳을 잃었다. 화려한 시절은 저물었지만, 대신 자동차와 친해지는 대중화가 시작됐다. 작고 효율 좋은 자동차가 여럿 등장하며 대중의 삶에 동반자로 스며들었다. 동경의 대상에서 함께 생활하는 존재로 역할을 확장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친밀하게 다가갔다.

70년대 자동차의 대표적인 모델은 폭스바겐의 골프다. 1974년 등장했다. 장수 모델 비틀 이후를 이어갈 대표 모델로서 폭스바겐이 선보였다.

골프는 대중의 마음을 겨냥했다. 폭스바겐 설계 사상과도 맞닿았다. 더 좋은 기술을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골프는 작은 차체지만 해치백으로 공간 효율성도 획득했다.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에 맞춤 모델이었다. 그렇다고 자린고비 정신만 좇진 않았다. 선택지를 넓히며 자동차를 즐기게 했다. 고성능 GTI부터 디젤 엔진을 품은 D, 낭만도 챙기는 카브리올레까지 선보였다.

전천후였다. 합리적인 가격에 더 다채롭게 자동차를 바라보게 했다. 잘 만든 상품으로서 하나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또한 골프는 작은 차체에 장식을 배제한 직선 디자인이 돋보였다. 직선의 마술사로 불리는, 조르제토 주지아로라는 걸출한 디자이너의 작품이었다. 골프를 비롯해 여러 자동차가 직선 디자인을 입으며 화려한 시대와 결을 달리했다.

바야흐로 직선의 시대가 열렸다. 이런 직선 디자인은 20세기 마지막까지 이어지며 자동차 디자인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각진 차체는 공산품처럼 획일적이었지만, 그 자체로 간결한 절제미를 풍겼다. 더불어 해치백이라는 공간 효율 좋은 장르는 대중차로서 많은 사람의 필요를 충족했다. 골프가 다른 모델보다 더 눈에 띄는 이유였다. 전에 없던 웰메이드 제품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대표성을 획득했다.

1970년대는 골프처럼 대중성을 토대로 아이콘이 된 대상이 많았다. 대중문화 속 아이콘들이 대표적이다. 대중문화가 꽃피운 시대는 1980년대지만 다방면에서 태동한 시기는 70년대다.

 ‘대중문화의 레트로’ 하면 떠오를 상징적 작품이 이때 대거 등장했다. <죠스>나 <스타워즈>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 스페이스 인베이더> 같은 전자오락이라는 게임 분야가 태동했다. 모두 산업적으로 규모를 키워 대중성을 획득한 분야다. 그리고 모두 현재 레트로라는 흐름에서 아이콘으로 회자된다.

1970년대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시대다. 더 오래된 시대는 클래식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어감 차이지만 구별하자면 그렇다. 레트로는 그보다는 더 가깝고 더 대중적인 대상을 칭하는 경우가 많다.

70년대는 대중의 인기가 후일 레트로로 이어지는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 1세대 골프의 위상이 그러하듯. 그런 점에서 70년대는 흘러간 시대지만,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20세기 말에 태동해 21세기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시대. 1970년대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난다.

자동차의 민주화

1900년대 초 / 미국 / 포드 T

“난 그래서 미국식 마케팅이 마음에 안 들어.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게, 온 세상에 뿌리려 하잖아.” 요새 안 보면 대화에 못 낀다는 <에밀리, 파리에 가다> 속 장면이다. 극중 미국인 에밀리는 자사가 인수한 프랑스 명품 마케팅 회사에 파견을 가게 된다. 미국식 선진 기법을 전수하려는데, 현지 프랑스인 상사가 딱 저렇게 면박을 준다.

서문이 길었다. 내가 뽑은 자동차의 골든 에이지는 20세기 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헨리포드가 자동차 공장에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한 직후. 소수 귀족과 상류층을 위한 명품이 평범한 우리네 ‘삼백충(월 300만원을 버는 사람)’들 집 앞에 하나씩 놓이기 시작한 시점이다. 골든 에이지라 하면 그 정도 변화는 동반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품종 대량생산 시스템이 ‘이동 수단의 민주주의’를 실현한 셈이니 말이다. 대통령도 서민들과 함께 빅맥을 즐기는 나라답다.

이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극단적으로 효율성을 높였다. 각 노동자는 정해진 자리에서 바퀴만 끼우면-페인트만 칠하면-최종 검사만 하면 된다. 마치 군대에서 준비태세 훈련 때 임무 순서를 미리 정해놓듯 말이다.

 일이 터지고 생각하면 늦다. 기계처럼 정해진 순서로 물자를 옮기고, 진지를 점령한 뒤 공격 준비를 마쳐야 한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은 전쟁 같은 위기 상황에서 힘을 발휘한다. 괜히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승리를 거둔 게 아니다. 물량에 장사 없다. 결국 모델 T로 시작된 포디즘(Fordism)은 20세기를 관통하는 제조업 시스템의 근간이 되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권력이 되면 부패하기 마련. 시간이 흘러 ‘포디즘’은 ‘꼰대이즘’으로 변질됐다. 산업화 신화를 이룩한 이들은 21세기에도 일괄 주문, 일괄 생산을 고집했다. 중국집에 나란히 앉은 직원들은 하나같이 짜장면을 주문한다. 마파두부밥, 삼선울면 따위를 외치면 눈칫밥이나 먹어야 했다.

 일괄 주문 원칙에 어긋나니까. 물론 옛날 얘기다. 얼마 전부터 이런 꼰대들은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탕수육 소스 붓기 전에 ‘부먹’과 ‘찍먹’을 체크하는 문화도 자리 잡았다. 다품종 소량생산 이데올로기의 반격이다.

이제 자동차 공장으로 돌아오자.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업계 안에서도 무식한 포디즘 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적시 생산으로 재고를 최소화한 토요타의 JIT(Just in Time)나 하나의 플랫폼으로 다양한 수요에 대응하는 폭스바겐의 MQB 플랫폼 같은 것들 말이다. 특히 본질만 남기고 자유롭게 활용하는 모듈 방식은 또 한 번의 골든 에이지를 이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가히 자동차 인더스트리의 짬짜면이라 할 만하다.

자동차의 골든 에이지는 끝나지 않았다. 10년, 20년 뒤 전기차 시대에도 컨베이어 벨트는 건재할 것이다. 그 앞에 노동자 대신 로봇이 서게 될 뿐. 그래서 요새는 ‘기본소득’ 개념이 힘을 얻는 모양새다.

‘최저생계비는 나라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100여 년 전 포드와 히틀러가 각각 모델 T와 비틀로 내세웠던 ‘기본 자동차’ 복지 개념은 어떻게 진화할까. 한 가정 한 전용기라도 도입해야 할까. 자동차는 럭셔리인가, 국민의 기본 권리인가. 느닷없는 원고 청탁을 받고 생각이 길어졌다.


전쟁이 낳은 패밀리카

1940~50년대 / 미국 / SUV

SUV를 잉태한 건 참호전의 비극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럽의 서부전선에서 4년이나 치러진 참호전은 지리멸렬한 소모전이었다.

솜 전투에서만 피아 모두 12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넉 달 보름 동안 벌어진 무참한 살육전의 대가는 연합군의 9.6km 전진. 각국은 항공기와 전차처럼 화력과 기동성을 갖춘 무기 개발에 나섰다. 다목적 경량 군용차도 만들었다. 속도전으로 전환하면서 보급과 수송은 물론 공격에도 활용할 수 있는 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31년 벌어진 만주사변 이후 중국과 계속해서 전투를 이어간 일본 제국은 1936년 세계 최초의 네바퀴굴림 차 중 하나인 쿠로가네 타입 95를 생산했다. 소련은 1940년 민수용으로 출시한 네바퀴굴림 모델 GAZ-61을 군에 보급했다. 나치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가 1934년 페르디난트 포르쉐에게 다목적 경량 군용차 개발을 지시, 1940년 퀴벨바겐을 보급했다.

미국은 늦었다. 이미 닷지 WC 시리즈 같은 적재중량 500~750kg인 전천후 군용트럭을 보유했지만, 퀴벨바겐의 기량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제야 기동성 좋은 소형차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10개월이나 지난 1940년 7월 11일, 미국 내 135개 자동차 제조사에 소형 군용차 개발을 의뢰했다. 필수로 내건 여러 까다로운 조건에 맞는 차를 개발해 49일 내 시제품을 제출하고, 75일 안에 70대의 테스트용 완제품을 가져오도록 했다.

의향서를 낸 곳은 아메리칸 밴텀과 윌리스 오버랜드뿐이었다. 날짜를 맞춘 건 아메리칸 밴텀이었다. 칼 포브스트라는 걸출한 엔지니어의 성과였다. 당시 자동차 시장의 큰손이던 포드는 뒤늦게 뛰어들었고, 윌리스 오버랜드는 일정을 맞추지 못했다.

이들은 결국 아메리칸 밴텀의 시제품을 일부 모방해 제출했다. 아메리칸 밴텀은 반발했다. 그 때문에 미군은 아메리칸 밴텀의 40 BRC, 포드의 GP, 윌리스 오버랜드의 MA를 각각 1500대씩 납품받았다. 하지만 표준화를 위해 단일화가 필요했다. 성능이 좋았던 윌리스 오버랜드의 MA에 다재다능했던 포드 GP의 장점을 더한 윌리스 MA의 후속, 윌리스 MB는 그렇게 탄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윌리스 MB의 활약은 대단했다. 정찰은 물론 산악전과 기습작전에서 출중했다. 보급과 구급차로서도 뛰어났다. 윌리스 MB는 엄청난 활약으로 영국군에게도 보급됐다. 소련과는 라이선스 생산을 계약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며 윌리스 MB도 생산을 멈췄다. 하지만 윌리스 MB는 미국에서 민수용 지프란 의미의 CJ(Civilian Jeep)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이어갔다.

현대적인 의미의 첫 번째 SUV가 탄생한 순간이다. 현재 지프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SUV 브랜드로 인정받는 랜드로버의 기원 또한 윌리스 MB다. 로버의 엔지니어 모리스 윌크스는 영국군에 보급된 윌리스 MB가 종전 이후 농사에 쓰이는 것을 보고 신차 개발을 기획했다. 비포장도로인 교외나 농경지에서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차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윌크스는 윌리스 MB를 기반으로 로버의 신차를 개발했다. 이 모델이 바로 랜드로버의 기원, 시리즈 1이다.

윌리스 MB는 사실 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는 시발택시로 유명한 시발이 있다. 한국전쟁 이후 남은 윌리스 MB를 재생해 만든 자동차다. 필리핀에 가면 볼 수 있는 지프니도 마찬가지다. 적재공간에 사람들을 태워 노선버스처럼 운행하는 지프니는 윌리스 MB를 기다랗게 개조해 운행한 게 시초다.

SUV의 황금기는 사실 이제 막 시작했다. 쫀득한 주행 감각을 선호하는 유럽에서도 SUV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포드는 SUV 전문 브랜드로 변신을 선언했다. 하지만 SUV의 진정한 골든 에이지는 윌리스 MB가 전장을 누비던 1940~50년대다. 윌리스 MB가 그렇게 활약하지 않았다면 SUV의 시대는 아직 요원했을지 모른다. 골든 에이지의 주인공은 스타가 아니라 레전드가 되는 게 맞다.
<출처 : 모터트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