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 후에
Someday My Prince Will Come; After Love Has Gone; Maiden Voyage
오랜만에 먼 곳에서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냥'이라고 말했지만, 삶은 이 친구에게도 힘겨움을 준 모양입니다.
함께 산책을 나가기로 했습니다.
제자는 문득 예전에 들려주었던 '사자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 하더군요.
추위가 막 가신 시골 길을 걸으며, '사자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다리에 커다란 족쇄를 찬 사자가 있었어.
그 족쇄는 사자의 다리를 매일매일 아프게 조여서
사자는 늘 고통을 느껴야만 했지.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고통은 족쇄만이 아니었어.
아픔으로 고통을 느낄 때마다 포효하는 자신을 보며
두려워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떠나버리는 사람들에게서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했으니까.
셀수 없이 많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동안,
사자는 홀로 자유를 위해 쉼없이 노력했지.
족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포효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온 힘을 다해 연습을 했던거야.
그러나,
그러한 사자의 삶은 너무나 고독했어.
달이 오롯이 떠오르는 밤이되면
사자는 생각하곤 했지.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고 말이야.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제자는 생각에 잠긴 채 조용히 말했습니다.
'자신만의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그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원래 하나였던 우리가 어떠한 이유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후,
'자신만의 누군가'를 통해 진정한 이해와 사랑을 바라는 '병'이 생겼는데, 그것은 마치 고향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향수병과 닮은 그 무엇은 아닐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재즈명곡 중에도 '자신만의 누군가'를 간절히 열망하는 곡이 있는데요,
조용한 오후의 시골길이 'Someday My Prince Will Come(언젠가 나의 왕자님은 반드시 와 줄거에요)'이라는 곡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이 곡은 1937년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만화영화 '백설공주(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의 삽입 곡으로, 원래는 팝쟝르지만 빠르게 재즈 스텐다드(jazz standards)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많은 재즈 버전이 존재하고 있지만, 오늘은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버전으로 선택했습니다.
¾박자의 재즈왈츠와 투박한 라이드 벨(Ride Bell)의 연주가 주는 순수함,
뮤트된 트럼펫(Muted Trumpet) 소리가 주는 외로움과 고독함,
그리고 해드(Head)를 3번 반복하며 그 때마다 더해지는 간절함이,
이야기 속 '사자'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자이야기'는 계속됐습니다;
드디어
사자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지.
하지만, 그 사랑은 짝사랑이었어.
사자는 족쇄를 차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사랑을 말할 수는 없었던 거야.
그 후로도 또다른 사랑이 종종 사자를 찾아왔지만,
포효하는 사자를 모두 떠나버리고 말았어.
아픔과 슬픔의 한 가운데에 서서
사자는 사랑을 향한 마음의 등불을 모두 꺼버렸지.
그 후로 오랫동안,
사자는 길고 긴 병에 시달려야만 했대...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
사자가 스스로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바로 그때, 기적이 시작된 거야.
사자는 다시 묵묵히 연습을 했어.
족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포효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기처럼 고통받는 누군가를 위해.
외롭기는 했지만 이제 견딜만 했지.
사자는 성장해 있었던 거야.
이제 족쇄의 고통도 참을만 해졌고,
포효도 많이 잦아들었어.
달무리가 너무도 멋지게 하늘을 뒤덮던 어느 밤,
사자는 또다시 생각했어.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고 말이야.
그것은 커다란 용기였지.
사랑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다시금 연거니까.
그날부터 사자는 매일 매일 기도를 했대.
그리곤 한 소녀가 거짓말처럼
사자 앞에 나타났어.
소녀는 사자를 향해 지고한 사랑을 말했지.
그녀의 말은 '특별'했어.
사자는 행복했지.
하지만, 이 사랑도 무너져 버렸어.
현실 속 그 소녀는
사자의 아주 작은 포효조차도 견디질 못했거든.
소녀는 결국
멀리 멀리 도망가 버리고 말았어.
사자는
커다란 절망과 슬픔을 가슴깊이 느꼈지.
“사랑의 본질은 고통일까요?”
심각한 표정으로 제자는 물었습니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랑을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난 후 그 마음이란 대체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단순한 진실'을 마주 대하며 모순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읍내에 도착해 작은 찻집으로 들어섰습니다.
손님이 거의 없는 그 찻집 창가에 앉아, 'After Love has gone(사랑이 끝난 후에)'이라는 곡을 들었습니다.
오리지널 곡은 Earth, Wind, & Fire라는 그룹이 불렀지만, 우리는 커트 일링(Kurt Elling)이 부른, 완전히 다른 느낌의 재즈 곡을 선택했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커트 이링(Kurt Elling)은 '그 사자'를 연상시키는 낮은 음성으로 원곡 보다 느리게 읊조리 듯 노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야기를 하듯 말이죠.
그는 절실히 묻고 또 물었습니다.
“Can love that's lost be found?(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라고.
원곡은 마치 밀크 초코렛처럼 달콤한 슬픔이 느껴지지만, 커트 이링(Kurt Elling)의 곡은 다크한 초코렛처럼 깊이있고 쓰디쓴 슬픔이 느껴졌습니다.
제자는 그 다음 얘기를 기다렸습니다;
사자는
소녀를 믿고 싶었어.
그래서
소녀를 다시 찾아갔지.
하지만,
사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
소녀의 머리에 커다란 족쇄가 채워져 있었거든.
소녀는 '생각'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었던거야.
손도, 발도, 소녀의 그 어떤 것도 자유로왔지만
생각의 족쇄는
그 무엇 하나도 소녀의 '의지'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지.
사자는 그런 소녀를 한참 동안 지켜 보았대.
그리고는
돌아섰어.
사자는 이제
소녀도, 그를 아프게 했던 모든 이들도 원망하지 않았어.
그들의 고통을 이해했으니까.
사자는 수많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지.
그리곤
다시 일어났어.
사랑한 후에
사자는 알게 됐지.
누군가를 통한 행복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한 후에
사자는 진실로 알게 됐어.
지고한 행복은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사랑한 후에
사자는 깨닫게 된거야.
사자는 포효를 할 때 비로서 사자답다는 것을.
여전히 족쇄를 차고 있었지만
그것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어.
사자에게 자유란 이제,
족쇄를 찬 채로의 자유를 뜻했거든.
사자는
새로운 세상으로
첫 발을 내딛고 있었던 거야.
제자는 눈물이 그렁인 채로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우리는 가로등이 하나 둘 들어오기 사작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은 거침없이 넓은 벌판이 양 옆으로 펼쳐져있는 멋진 길이었습니다.
헐비 행콕(Herbie Hancock)의 'Maiden Voyage(처녀항해)'는 이제 또다른 차원의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은 '그 사자'에게 들러주고 싶은 곡입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1965년에 녹음 된 헐비 행콕(Herbie Hancock)의 5번째 앨범 중 첫번째 수록곡으로, 드넓은 미지의 바다로 첫 항해를 떠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피아노와 라이드 심벌(Ride Cymbal)이 함께 만드는 특징적 리듬패턴은 첫 항해에 대한 설레임과 희망 그리고 동시에 이루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루브(Groove) 위에 트럼펫과 테너 섹스폰이 만들어내는 주 멜로디는 반복적으로 길게 길게 내뿜듯이 연주됩니다. 마치 첫 항해를 축복해 주는 힘찬 기적소리처럼 말이죠.
마지막 해드(Head) 직전에 연주되는 헐비 행콕(Herbie Hancock)의 피아노 알페지오는 처녀항해를 하는 이가 마음으로 바라 본 바다입니다.
미지의 세상에 대해 무한한 희망과 신뢰를 가진 첫 항해자에게 바다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부디 멋진 여행이 되길!
“사자는 이제 행복할거에요!''
제자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습니다.
시선을 들어 드넓은 들판 저 편을 바라보았을 때,
황금빛 갈기를 휘날리며 늠름히 서있는 '그 사자'를 보았습니다.
사자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거침없는 포효를 해댔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슴을 치는 멋진 포효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JM
맨 위의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터
한차연님의 작품 '사자,
소녀'입니다.
//모든 칼럼의 저작권은 칼럼니스트 김재명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