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와 마음 이야기

김재명

JM Company 대표

  • 작곡가, 재즈 칼럼리스트/작가
  • Queens College of Music, New York, NY 석사

그때 그들은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을까------------------재마칼럼27

글쓴이: Panda  |  등록일: 01.01.2018 18:26:46  |  조회수: 5270

그때 그들은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Billy Tipton




그때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이 말하는 이해와 내가 기대하는 이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고스란히 나의 상처가 됐다.



상처는

지독히도 아프고 고통스러웠는데

분노, 불안, 그리고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랐다.



그들은 그때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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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y tipto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Sit Right Down and Write Myself a Letter_Billy Tipton

Photo from Youtube



이해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 중 빌리 팁튼(Billy Tipton)도 있었다.


그는 미국 재즈 뮤지션으로 피아노를 치며 밴드를 이끌었는데,

주로 당시 대중적 인기가 있는 스텐다드한 스윙위주의 음악을 했다.


그의 음악은 따라서

평범하고 안전하게 들린다.


특징이 있다면,

높은 음역대에서 주로 연주되는 스케일 위주의 솔로가 아닐까 여겨진다.

음역대를 달리함으로써 해드(메인 파트)와의 차별성을 꾀하고 지루함을 피하며

피아노라는 악기 하나에서 다중적인 음색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의 선율을 따라가다보면 부드럽고 유려하다는 인상을 받게되는데

다른 남성 재즈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와 비교해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섬세한 여성미가 돋보인다.



'여성미' 라는 이 일상적 수식어가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는 빌리 팁튼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지 마음이 쓰였다.


그는 한 평생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성정체성을 갖은

'다른 종류의 남자' 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트렌스젠더라 부른다.


하지만,


그 정의는 편향적이고 공평하지 못하다.

주류, 즉 성 정체성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자신들을 '정상'에 놓고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규정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반남자에 대비해

'다른 종류의 남자' 라 부르겠다.


'다른 종류의 남자' 는 남자지만

일반 남자와는 다른 육체를 타고난 존재로 그 차이점을 크게 설명할 수 있겠다.


,

일반 여성과 같은 육체를 공유한다.



확률은 적지만

그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도태되지 않고 쭉 존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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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in Beguine_Billy Tipton

Photo From Wikipedia



남자라면

이러 이러한 육제를 가져야 하고

여자라면

이러 이러한 육제를 가져야 한다고


마치 만고의 진리처럼

인류가 쥐고 있는 그 생각 하나가


그렇지 않은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들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고통으로 이끌었다.



그렇지 않은가?


네모난 종지에 간장이 주로 담겨왔다고 해서

네모난 종지를 보면 으래 간장종지라 부르는 것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옳지는 않다.


만약,

그 네모난 종지에 식초가 간혹 담겨진다면

그 종지는

여전히 간장 종지인가?


당연히 식초 종지라 해야 맞지 않을까?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이름들은

그 용도, 즉 내용에 기반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그리고 보아온 경계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보았을 때,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자신들의 경계 안으로 끌고 들어오려

무리수를 행하다

결국 조금 다른 존재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유발시킨다.



그들은

육체를 잘못 타고난 존재가 아니며,


다른 종류의 남자에게는

'정상적인 육체'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그 육체는 이 경우,

여성의 육제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남자''육체' 라고 이름해야 맞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남자'가 아니던가.


그저 다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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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dido_Billy Tipton

HistoryInOrbit.com



그러나,


무지한 현실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으로 큰 힘겨움과 고달픔의 짐을 지운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특히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191412월에 태어나 19891월에 삶을 마감한 그의 삶의 배경을 살펴보면,

1, 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미국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는 미국 수정헌법 제19조가 통과된 것이 1920년이며, 1965년이 되서야 미국 흑인의 참정권이 법으로 보장된 그러한 시대였다.


동성결혼으로 대변되는 성소수자의 인권 성장은

그의 삶의 사후에나 활발히 논의된 것으로 또한 숱한 논쟁을 하고 있는 진행형의 사안이다.



처음에는

재즈 무대에서만 남장을 하는 여자로 인식되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대 안팎에서 모두 남성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몇몇 여성들과의 교재, 결혼, 그리고 입양.


하지만,


자신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는 못했던 듯 싶다.

치명적 차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자신의 다름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

한 남성으로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는 자신의 육체성을 감추고 속인다.


남자는 이러한 이러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고, 그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던 그 환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다름에 대한 최선의 방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역시 인류 문화 밖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의 다른 육체를 포함하는 온전한 성정체성을 확립한 상태가 아니였으므로

일반 남성의 육체를 갖지 못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른 남성'으로 인식하고 드러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사후, 그의 육체성이 일반 남성과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불행히도 여자지만 남자로 살아간 사람으로서

세간 사람들의 많은 호기심과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그는 남자였다.


하지만,

일반 남자와 다른 육체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의 육체성을 부인하고 숨긴 채 일반 남자 행세를 하면서 살아가야만 했던

절박한 한 남자였다.


그런 육체를 가진 남자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그 이해 하나가

그에게도, 세상에게도 있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던 차갑게 경직된 세상.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든 사람들의 닫힌 마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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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 Georgia Brown_Billy Tipton

Photo from Audio Preservation Fund



나를 이해하지 않았던 그들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었고, 내가 정의롭다고 믿었던 사회였으며, 내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던 세상이었다.


그들은 왜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았을까?



자신들의 삶만으로도 벅차고 힘들었을 그들은

그래서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무지했고

무심했으며

무기력했다.



그들은 행복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한 삶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수많은 존재들이

핍박받고 버림받고 학대받고 죽어가는

이 지구에서


나역시

나를 아프게 했던

그들과 다르지 않은 논리로


나와 닮은 인류와

나와 조금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살아왔다.



우리는 틀렸다.


아무리

자신의 삶이 버겁고 힘겨웠어도

그래서는 안됐었다.



이해란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선택적 무엇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생존의 방식인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한 댓가는


오늘

우리의 고통을 만들었다.



어떤 한 존재에 대한

온전한 이해조차도 없이 살이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만약,

핍박받고 고통받는 누군가가

지친 모습으로 다가와

왜 그때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저 몰랐다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절대 그런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논쟁하며


충분히 아팠을 그들에게

또다른 상처를 줘버리는 것은 아닐까?



본질은 그것이 아니지 않은가?


차디찬 그들의 손을

따듯이 잡아주며

얼마나 힘들었는지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는 힘것 위로해 주는 것.


그리고

그들과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작든 크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 나가는 것.


그것이 정말

어려운 일일까?



다른 존재의 고통에 눈을 감아버린

우리의 삶이,


과연

몇푼어치의 가치를 지닌단 말인가?




JM



이 칼럼의 저작권은 칼럼리스트 김재명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재즈와 마음을 이야기하는 블로그

https://blog.naver.com/lydian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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