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무게
Swing & Improvisation
왕자는 성에서만 살았습니다.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렇듯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아침부터 잠이 들 때까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들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무거워졌으며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성은 생각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이젠
왕자 스스로도 나가는 문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은 어느새 그의 주인이 되어 버렸고,
그와 그의 성을 지배했습니다.
왕자는 생각에 지치고 찢기어
이 고통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똑똑똑!
누군가 그의 성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똑똑똑!
그러나,
생각에 빠진 왕자는 들을 수가 없었죠.
똑똑똑!
그제서야 왕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이 낮선 상황에 당황한 채로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똑똑똑!
간신히 용기를 낸 그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심스레 다가갔습니다.
그곳엔 너무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녹이 슬어버린 문이 있었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그 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는 작고 더러운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신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그런데 무슨 일로?”
“당신이 13년전 기도했던 것에 대한 응답으로.”
“무슨 기도를 했었지?”
“행복하고 싶다는 기도.”
소크라테스라는 고양이는 어리둥절해 있는 왕자를 지나
그의 성 가득 들어찬 생각들을 훑어 보았습니다.
“많이 힘들었겠군.”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생각의 무게를 잴 수 있지. 당신의 성은 곧 무너질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해?”
“나와 함께 가자.”
“어디로?”
“생각 밖의 세상으로”
왕자는 소크라테스가 가자는 그 곳도 두려웠지만,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 더욱 두려웠기에 따라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공기는 찼지만 하늘은 높고 청명한 가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솔길을 지나 산과 들을 걷고있는 왕자에게는
얼굴에 와닿는 바람도, 다리를 스치는 들풀들의 촉감도, 늠름하게 펼쳐진 산세도, 드넓은 하늘의 모습도
온통 불안하고 두렵게만 느껴졌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성에서 생각도 함께 가지고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생각에 걸러진 모든 모습들은 그를 한없이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어둑어둑 해지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사방이 온통 컴컴해져 도착한 곳은 지붕이 없는 작은 오두막이었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자.”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작은 불을 피우고
나란히 앉은 왕자와 소크라테스는 말이 없었습니다.
“슈욱 슈욱...”
왕자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습니다.
“뭐지?”
“별들이 떨어지는 소리야.”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무리를 지며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왕자의 심장은 또다시 마구 뛰었습니다.
“왜 생각을 하게 됐지?”
“행복해 지려고.”
“얼마동안이나?”
“13년 동안”
“그래서 무언가 발견했니?”
“아직.”
“더 생각하면 행복해 질까?”
“잘 모르겠어.”
왕자는 지친얼굴로 어둡게 말했습니다.
“별들이 두려워지면 이렇게 주문을 외워봐.”
“?”
“별은 별일 뿐이야. 라고.”
왕자는 밤새 한 숨도 못잔 채 주문을 외워야 했습니다.
다음날은 바다가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태어나 처음 본 바다는 왕자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죠.
파도 소리도, 갈매기의 날개짓도, 모래의 감촉도 모두 모두 무서웠습니다.
주저앉은 왕자에게 소크라테스가 다가왔습니다.
“괜찮니?”
“아니, 한 걸음도 걷지 못하겠어.”
한참을 그곳에 함께 있던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인간들은 고양이보다 느리지. 그렇게 큰데도 말이야.”
“그럴리가. 내가 달리기를 얼마나 잘했는데.”
“저기 깃발까지 달려볼까?”
둘은 깃발이 있는 곳까지 열심히 달려갔습니다.
“이봐, 내가 이겼지?”
왕자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돌아봐. 니가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겠다던 곳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뛰어왔는지.”
왕자가 뒤를 돌아보자 소크라테스가 연이어 말했습니다.
“두려움은 니 생각에만 살아.”
바다를 지나고,
커다란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을 지났습니다.
왕자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갔고 이제 늠름한 기운마저 느껴졌지요.
도시에 도착하자
길을 떠난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오늘 밤 있을 음악회 얘기를 하며 들떠 있더군요.
밤이되자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 왕자와 소크라테스도 따라가 보았습니다.
연주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 얼마만의 연주회인가!' 하며 들떠 있던 왕자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대 위엔 열 댓명의 연주자들이 있었는데,
마치 자신의 집에 있는 것처럼 너무 편안한 자세와 표정으로 연주를 하고 있을 뿐더러
몇몇 연주자들은 음악에 맞춰 벌떡 일어나더니 좌우로 몸을 흔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걸어다니며 연주하는 연주자를 보았을 때 왕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왕자가 말했습니다.
“너무 경박해.”
그래도 음악에 집중해 보려고 노력 했지만,
이번엔
그들의 연주 내용이 몹시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더블 베이스와 드럼이 만들어내는 리듬섹션(Rhythm Section)은 이 빅 밴드(Big Band)의 척추라도 되는 듯, 음악의 시작부터 끝까지 크고 노골적으로 반복적인 리듬과 느낌(Groove)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이건 대체 뭐야.”
이러한 강력한 리듬섹션 위로 리드섹션(Lead Section)이 들리는데, 금관악기(Brass)인 트럼펫과 트럼본, 섹스폰과 클라리넷으로 이루어진 목관악기(Woodwind), 그리고 바이올린과 기타로 대변되는 현악기(Strings)로 나누어지는, 그가 보아온 오케스트라와는 사뭇 다른 악기구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난감한 점은 따로 있었죠.
연주되는 모든 음악들이 강박(On Beat)이 아닌 약박(Off Beat)을 강조하며 연주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강박의 음들은 붙임줄(Tie)이나 쉽표(Rest)로 처리되고 있었습니다.
“스윙(Swing)이라고 불러.”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음악 이론에 따르면...”
장황하게 설명하던 왕자는 단호히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이 음악은 틀렸어!”
“너의 기준에선 그렇구나.”
“아니, 원래 음악은 그래야 해.”
“원래란 없어. 넌 니 생각이 절대적인 거라고 믿고 있을 뿐이야.”
“아무리 따져봐도 내가 옳아.”
“저들 역시 너만큼의 이유와 논리와 의미를 가지고 이 음악을 하고 있는거야.
따라서 모든 생각의 무게는 같아.”
왕자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침 그 때, 연주자 한 사람이 무대 중앙으로 오더니 커다랗게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독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다른 연주자들은 그의 독주를 받쳐주려는 듯 소리를 작게 줄이고는 박자는 더 단순하게 만들고 음이 있는 악기들은 기본 화음(코드)을 짚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주가 참으로 괴이했습니다.
스케일을 나열하는 것 같은 이상한 멜로디에 박자는 제멋대로 변형을 주곤했는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준비되지 않은 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솔로 연주(Improvisation)라고 해”
왕자에게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이성적이지도 않고 준비되지도 않은 연주로군.”
“아니, 직관적인 연주지.”
“직관?”
“생각 이전의 상태.”
“그것이 가능한가?”
“생각만 내려놓는다면 얼마든.”
“생각을 내려놓는다고? 그게 말이 되나? 생각은 곧 나인데?”
“아니, 생각은 생각일 뿐이야.”
왕자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 고양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죠.
많은 시간이 침묵과 함께 흘렀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린 불꺼진 무대 위에 왕자와 소크라테스가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생각 역시 필요한 거니까 있는 거잖아? 생각이 그렇게 나쁜거야?”
“마음속엔 생각도 있지만, 오감에 대한 느낌도 있고, 감정도 있고, 직관도 있어.
그 요소들을 균형있게 잘 사용한다면 모두 필요한 것이지만, 생각만을 맹신하게 된 너의 마음은 균형을 잃어 버린거야.
균형을 잃은 마음은 고통을 느끼지.”
한참을 아무말도 하지 않던 왕자가 물었습니다.
“생각만으론 행복해 질 수 없니?”
“아침에 지져귀는 새 소리, 자연의 섬세한 몸짓, 다정한 이웃들의 모습,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음과 슬픔은 마음으로 느끼는 거야.
생각의 무게는 니 생각처럼 무겁지 않아.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지.”
왕자는 오랜시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일어섰습니다.
새벽이었습니다.
“삶을 살아가기로 했어. 생각이 아닌 나로서.”
문을 밀치며 뒤 돌아보는 왕자는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그의 이마엔 지혜의 빛이 빛나기 시작했지요.
“안녕. 소크라테스.”
“안녕.”
새벽 별들이 왕자의 마음에 그대로 박혔습니다.
왕자는 깊은 심호흡을 했습니다.
너무도 상쾌했습니다.
JM
//모든 칼럼의 저작권은 칼럼니스트 김재명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