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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글쓴이: peterkim1  |  등록일: 02.18.2011 05:02:02  |  조회수: 6903
(1)

 나는 왜 지금한국인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가

올해 한국 나이로 77세를 맞는다.
한자로 七七(칠칠)이라고 쓰면 기쁠 喜(희자의 초서체와 비슷하다 하여
흔히 喜壽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나이는 기쁨도 아니요, 老樂을 의미하는 숫자도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물음에
더 이상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나에게 누군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한국말로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줄곧 글을 써왔다.
그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으로 살아왔다.
평생을 쉬지 않고 평론과 논문, 에세이, 칼럼, 드라마, 시나리오, 소설, 시
그리고 얼마 전에는 뮤지컬 공연물까지 썼다.
심지어 표어까지 썼다.
올림픽 때의벽을 넘어서와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라는
캠페인 카피가 그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한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
일장기가 걸린 교실에서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던 탓이다.

남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식민지 아이로 태어난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한국말로 글을 쓰며그것으로 밥 먹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맙고 황송하고
눈물겹도록 큰 축복이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아직도 쓰지 못한 글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역사도 아닌 이를테면
한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모든 한국인의 이야기,
소설이며 전기이며 동시에 역사인 그런 글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숫자다는 말이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한 사람의 죽음은 소설이요, 100만 명의 죽음은 역사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불행은 로마인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도 한국인 이야기는
이념논쟁을 해야 하는 재미없는 역사교과서에서 배울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일단 그 굴레에서 벗어나면 소설보다 재미있고 역사보다 엄숙하게 흐르는
한국인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쓰고 싶은 한국인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스토리가 되어서도 안 되며
추상적인 집단의 히스토리가 되어도 안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누이가 나물 캐러 다니던 채집시대 때의 아이가 농경, 산업, 지식 정보시대를 걸쳐
우리 손으로 개를 복사하는 바이오 시대의 전 문명과정을 한꺼번에 겪으며
머리털이 세어 가는 그런 나라가 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큰 전쟁을 두 번씩이나 겪고 혁명을 서너 번 치르며 70여 년을 블랙 홀 같은 소용돌이를
횡단한 사람들의 집단추억 그런 이야기를 어느 사회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의 물음을 한국인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 보자.
한국인의 가슴과 성벽, 장터와 그 깃발에 부는 천의 바람을 통해
한국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위기 때마다 한 몸이 되는 한국인 DNA

산불이 나면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깨진다.
큰 짐승이든 작은 짐승이든 평소에 쫓고 쫓기던 관계에서 벗어나
다 같은 방향으로 살길을 찾아 달려간다.
위기의 한순간이 정글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또 이런 말을 한다.
단세포 편모충(鞭毛蟲)인 클라미도모나스는 암수의 구별 없이
세포 분열로 번식을 한다.
하지만 환경이 변해 질소 같은 것이 부족해지면 둘로 갈라졌던 것이
다시 한 몸으로 합친다고 한다.
위기에 대처하는 이러한 능력 때문에 클라미도모나스는 발생생물학이나
유전학의 모델 생물로 많이 이용된다.
우리는 평균 3년 만에 한 번꼴로 난을 겪어온 민족이다.
국난의 산불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한 방향으로 뛰었고 환경이
어려워지면 클라미도모나스처럼 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관과 민이, 계층과 분파가 서로 증오하고 분열하고
얼굴을 할퀴다 나라를 잃는 실향민이 된 적도 있다.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작가로 구한말 세계 각처를 탐사한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한국을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러시아의 자치구 프리모르스키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 가는
그곳 이주민들은 달랐다.
깨끗하고 활기차고 한결같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국의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심과 게으름과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어 있었고, 아주 당당하고
터프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평상시보다 위기에 강한 민족, 남이 멍석을 펴주는 것보다
제 스스로 일을 할 때 신명이 나는 한국인의 기질을 일찍이 그녀는
한국의 난민을 통해 간파한 것이다.
어느 민족보다도 부지런하고 우수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 변해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숍 여사는 이렇게 희망의 말로 결론을 맺는다.
고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도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면
참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은 어떤가.
지금 세계시장의 정글은 불타고 있다.
그 불길은 한국을 향해 번져 오고 북한은 로켓을 발사해 불난 데
부채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가.
P리스트, J리스트, K리스트…. 끝없는 검은 리스트의 행렬 속에서
우리의 가슴은 더욱 암담하다.
백 년이 지났는데도 비숍 여사가 말한 정직한 정부,
그리고 참된 시민의 발전은 아직도 먼 곳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눈을 돌리면 세계의 무대에서 타오르는 또 다른 불꽃이 보인다.
WBC의 다이아몬드에서 뛰는 한국의 야구선수들이,
세계피겨선수권의 아이스링크에서 나는 김연아가,
그리고 한마음으로 열광하는 모든 한국인의 얼굴이 보인다.
함께 외치고 함께 감동의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또 미사일이 아니라 축구공을 놓고 남북한 젊은이들이 대결하는
잔디밭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비숍을 놀라게 했던 프리모르스키 난민들의 유전자가
어디엔가 마르지 않고 우리 핏속을 흐르는 게 보인다.
그러나 미안하다.
겨우 백 년 전 이방의 한 여인의 시각으로 한국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3)


 나기 전부터 이름 있어 당당한 놀랍고 신비한 태아들의 세계

『젊음의 탄생』강연이 끝나자 책을 든 청중이 사인을 받으려고 몰려왔다.
거의 기계적으로 사인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쑥쑥이라고 써 주세요라고
말하는 여성이 있었다.
놀란 표정을 짓자 제 아이에게 주려고요라고 말한다.
군이라고 써야 할지 양이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물었다.
여자애요, 남자애요
그러자 그 여성은 아직 몰라요라고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제야 나는 그 여성의 배가 불러 있는 것을 봤고 그 옆에는
곧 애기 아빠가 될 젊은이가 참나무처럼 서 있는 것을 봤다.
쑥쑥이는 胎名이었던 것이다.
이름이 있으면 태아도 우리와 같이 존재한다.
칠십 평생 처음으로 글씨도 모르는 배 속 아이에게
책 서명을 해 준 것이다.
처음엔 미소를 지었지만 나중에는 눈이 축축해졌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 眼濕이었다.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기계총이 나고 부황난 얼굴에는 으레 버짐이 번진
그 애들에겐 태명은 고사하고 본명조차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쇠똥이, 개똥이가 아니면 그 흔한 돌쇠였다.
그래도 남자아이는 천한 이름이라야 오래 산다는 속신 때문이라고 하자.
하지만 여자애들은 갓 났다고 간난이 섭섭하다고 섭섭이다.
그 흔한 언년이란 이름도 아마 언짢은 년이라는 욕일 것이다.
남과 다른 특성을 나타낸 이름이라 해도 겨우 점이 있다고 해서
점박이고 점순이다.
검으면 검둥이, 희면 흰둥이 그리고 검고 희면 영락없이 바둑이가 되는,
거의 강아지 이름을 짓는 수준이다.
동네에다 대고 바둑아라고 불러 봐라.
틀림없이 대여섯 마리의 개들이 떼를 지어 달려올 것이다.
동명이인의 여자애들이 강아지 이름처럼 그렇게도 흔했으니
이름이 없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요즘 젊은 부부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태명에는
남녀의 성별도, 누구 성을 따르느냐의 姓氏 문제도 없다.
그저 쑥쑥 자라라고 쑥쑥이, 무럭무럭 성장하라고 무럭이다.
튼튼히 크라고 튼튼이, 기쁘다고 기쁨이 그리고 또 그런 행복과 축복을
받으라고 행복이요 축복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태 안에서 우리와 함께 당당한 쑥쑥이에게
사인을 해 준 덕분에
그동안 잊고 살던 나 자신의 胎兒期에 대해서도 눈뜨게 됐고,
하마터면 빠뜨릴 뻔했던 한국인 이야기에 태아들이 생활하고 있는
신비롭고 놀라운 이야기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양철북』을 쓴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그 소설 첫머리에
자신의 탄생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양수의 어둠 속에서 철퍽거리고 놀다가 갑자기 환한 바깥세상으로
나오면서 처음 보는 불빛이 몇 촉짜리 전구였는지
그 상표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어제 일처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상상력으로 치면 그 못지않은 영화감독 스필버그는
외계인(ET)들을 태아의 모습처럼 보여 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가의 허풍이요 영화 속의 허상이다.
우리와는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쑥쑥이는 분명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內界人이다.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탄생의 비밀을 풀어 가자면
소설가나 영화감독의 상상력에만 의존할 수 없다.
로물루스 형제를 젖 먹여 키운 수상한 늑대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로마인 이야기』와 좀 더 다른 이야기를 하려면
늑대를 곰으로 바꾸는 상상력만 가지고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인과 과학자가 손을 잡아야만 쑥쑥이가 살고 있는 저 어둡고
신비한 태내 공간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4)

 어머니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들은 바다에서 어머니를 본다.
한자의 바다 海자에는 어머니를 뜻하는 母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말도 그렇다.
e의 철자 하나만 다를 뿐 바다도 어머니도 다같이 라 메르라고 부른다.
거기에 인당수 바닷물에 빠져 거듭 태어나는 심청이 이야기,
실험관의 인조인간 호문클루스가 갈라리아의 바다에 떨어져


생명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괴테의 『파우스트』,
그리고 또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장 콕토의 시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생명의 시원인 모태는 태초의 바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과학자들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바다가 아니라 20억 년 전 최초의 생명 세포를 태어나게 한

태고의 바다라고 한다.
이유는 그 바닷물과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의 성분이 비슷하고

거기에서 생명의 기적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海水와 羊水의 미네랄 화학기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겨자씨만 한 胎芽가 되어 어머니의 자궁 속 바다를 떠다니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태고의 그 바다는 어둡지만 참으로 고요하고 아늑했을 것이다.
하루에 일 밀리미터씩 자란다는 수정란의 미생물에서 수아가미와

지느러미가 달린

 물고기 모양으로 변해간다.
지구 생물의 진화과정으로 본다면 10억 년의 세월이 지나간 셈이다.
그 지느러미가 손과 발이 되고 폐가 생겨나면 물고기였던 나는

도롱뇽 같은 양서류로 변신한다.
정말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 같은 흔적도 남아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손톱, 발톱이 생기기 시작하면 나는

어느새 쥐와 같은 포유류가 되고 그 몸에 뽀얀 잔털이 자라면

영장류의 원숭이 모습으로 진화한다.
그래도 인간이 되려면 아직 수백만 년이 지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어떤 서사시도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놀라운 변신의 드라마를 보여준 적이 없다.
생물학자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머니의 바다(양수) 속에서 20억 년, 더 올라가면 40억 년의

기나긴 생물의 계통 발생 과정을 단 10개월 만에 치렀던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빛의 속도로 질주해도 불가능한 그 길고 긴

생명의 여정을 거쳐서 우리는 이 한국 땅에 안착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신화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동굴 속의 곰이었지만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미생물이었다.
한국인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원숭이와 쥐와

도롱뇽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였다.
그 바다 생물 중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껍질은 물론 가시조차 없었던

 脊索생물 피카이어였다는 게다.
못된 바다의 포식자 노티라스의 먹이로 쫓겨 다니다가

물고기로 진화하고 개구리 같은 양서류가 되어 헐레벌떡 육상으로

올라와 파충류와 포유류의 선조가 된 인간의 먼 핏줄이라 했다.
만약 피카이어가 절멸했더라면

우리들 인간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포식자들에 쫓겨 다니던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슬프고 이상한


생명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양수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태아들도 꿈을 꾼다는 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
지상의 꿈과는 분명 다른 꿈이었을 거다.


프로이트 박사의 분석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순수한 꿈,
초록색 바다의 꿈이 아니면 그냥 하얀 꿈이었을지 모른다.


축제의 불꽃처럼 일시에 생물들이 터져나온

캄브리아기의 바다 꿈이었을까.
그보다도 먼 우주 대폭발의 하늘 꿈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과

그 태아들도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잘 기억해 주기 바란다.
한국인 이야기를 하는데 두고두고 되풀이될 중요한 화두이니까.




(5)



 왜 울며 태어났을까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은 왜 큰 소리로 우는가.
바보들만 사는 당그란 무대에 타의에 의해 끌려나온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셰익스피어는 풀이했다.
과연 대문호다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한 가지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했다.
아이들이 타의에 의해 끌려 나왔다는 그 대목이다.
태아들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호흡운동을 하고

걸음마의 다리운동까지 한다.
이렇게 충분한 준비를 다 마치고 나서야 여행을 떠날 마음을 갖는다.
그 깜깜한 암흑 속에서도 출구의 산도를 용케 알고

그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다.
달력도 시계도 출생을 가르쳐 줄 학원 선생도 없는 나 홀로 공간에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오히려 출산일을 모르는 것은 산모 쪽이다.
배 속에 든 아이가 사인을 보내 진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분만일이 온 것을 눈치채질 못한다.
초음파로 태내를 환히 훑어보는 산부인과 전문의도 아이가

언제 나올지 정확한 일시를 모른다.

그래서 이따금 구급차 안에서 몸을 푼 산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 같은 멍청한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사주팔자 타고난다고 하지만 그 운명의 날을 선택한 것은

 바로 배 안에 있는 나다.
오히려 진짜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것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아이들이 아니라
인공 분만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온 요즘 아이들일 것이다.
제왕절개의 인공 출산이 얼마나 큰 폭력인가를 아이들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呱呱의 聲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들이마시는 호흡작용으로 닫혀 있던 폐벽이 열리는 소리다.
그리고 그 최초로 들이마신 숨이 생을 마칠 때 마지막 내쉬는 날숨으로

이어지는 한 호흡이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험난하고 허무한 세상으로 나가려고 목숨을 걸며

비좁은 산도를 빠져나오는 모험을 했다.
양수가 터지는 탄생의 순간 행복의 바다, 평화의 바다는 사라진다.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파도소리로 듣던 태아의 추억은 멈춘다.
아이의 출산이란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하는 것이다.
그때 터뜨리는 울음소리야말로 수억 년 전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상륙했던

생물들의 울부짖음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왜 편한 바다를 버리고 모래와 용암밖에 없는 불모의 육지로 올라왔는지.
포식동물로부터 피난처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신비한 힘이 있었던 것 같다고 진화론자들은 말한다.
정든 곳을 버리고 미지의 공간으로 나가려는 생명의 의지,
논리만으로는 풀 수 없는 어떤 고통에 대한 모험과 도전,
그것이 탄생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게 진화론인지 킬리만자로의 산꼭대기에서 얼어 죽은 표범 이야기를 하는

헤밍웨이 소설인지 분간할 수 없다.

태아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싶은 날에 태어났다.
나의 생일날은 내가 선택한 가장 성스러운 날이며 어머니의 바다를 떠나

육지로 상륙한 고난의 기념일이다.
나는 그날 총탄이 날아오는 육지를 향해 단신 상륙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성공을 했을 때 내 아가미는 허파로 변해 있었고
그 허파는 풍금처럼 상실한 바다와 새로 만난 대륙을 향해 울리고 있었다.
진통이 끝난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고고의 성을 들었으며
다음에 태어날 아이들의 바다를 준비하기 위해서 가장 청정한 바다에서

딴 미역국을 부지런히 드시고 계셨다

그러니까 바다에서 뭍으로 상륙한 우리 신생아들은 용감한 해병대요

영원한 해병대였던 것이다.

산모는 출산을 통해 자연의 큰 힘과 그 지혜를 배운다고 했다.
어찌 여성만의 일이겠는가.
탄생의 비밀을 통해 우리는 대륙으로 올라온 생명의 바다를,

생물학과 시학이 하나로 합쳐진 지혜의 책을 읽는다.



(6)






한국인은 한 살 때 태어난다


나는 한 살 때 태어났습니다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첫 줄에 나오는 대목이다.
당연한 소린데도 아주 참신한 충격을 준다.
그래, 정말 그래.
우리는 태어나면서 한 살을 먹었지.
나는 양력으로 12월 29일 태어나서 이틀 만에 두 살을 한꺼번에 먹은 사람이다.
하지만 비웃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태어난 아이를 0살부터 정확히 계산하는 서양 사람들이다.

그것은 일 년 가까이 어머니 배 안에서 열심히 살아온
태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과학이요 합리성이요 라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 나이 헤아릴 줄도 모르는가.
공장에서 나온 물건이라면 출고 날짜부터 따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눈코입을 달고 나온 아이들은 부품들을 꿰맞춘 TV 상자가 아니다.
19주째만 되어도 벌써 태아 손에는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지문이 생기고 손금이 잡힌다.
손금을 보는 사람은 태내 생활을 통해 앞날의 운명을 비춰보려는 것과 같다.
배 속에서부터 왼손가락을 빠는 아이들에게 왼손잡이가 많다는 것은
영국의 실험 결과에서도 드러나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태내 버릇 백 살까지 간다는
새 속담이 생겨날 판이다.
태내에서부터 성인병이 시작된다는 데이비드 버커의 책을 읽고 감동한 사람이라면
나는 한 살 때 태어났습니다라고 한 한국 작가의 소설에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현대소설은 고사하고 판소리 심청가를 들어보면 왜 한국 사람들이 태아의 나이까지
계산했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앞 못 보는 심 봉사는 태어난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몰라서 손으로 더듬어봐야 했지만,
그 애가 열 달 동안 어떻게 어머니 배 속에서 자랐는지는 초음파 사진을 찍듯 훤히 들여다본다.
그것이 중중모리 신가락으로 읊어대는 사십에 점지한 딸 한두 달에 이슬 맺고로 시작하는 심청이 출산 대목이다.
첫 대목부터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정자난자가 결합하는 것을 이슬을 맺는다고 한 촉촉하고 정감 있는 표현이다.
석 달에는 그 이슬에 피가 어리고, 넉 달에는 인형(人形사람 모양)이 생긴다.
다섯 달과 여섯 달에는 오포(五包:간장심장비장폐장신장)와 육점(六點:담위대장소장삼초방광)이 생겨난다고 묘사한다.
재미난 것은 여섯 달까지는 맺고 어리고 생겨난다고 하다가 일곱 달부터는 그 달수의 운에 맞춰 모두 열리는 것으로 바뀐다.
칠 개월에는 칠규(七竅)가 열리고 구 개월이 되면 구규(九竅)가 열리고,
열 달째는 금강문하달문뼈문살문의 모든 자궁 문이 열리면서 아이가 태어난다.
일곱에서는 일곱 수의 얼굴 구멍이 아홉에서는 하체의 두 구멍을 합친 아홉 수의 구멍이
열린다는 것도 짝이 맞지만 열 달에는 자궁문이 모두 열린다는 것도 딱이다.
일곱 수부터 모두가의 열린 모음으로 시작하는 한국말도,
그리고 정말 열에서 열리는 자궁문도 절묘하다.
과학의 정밀성과는 또 다른 시의 정교함이다.
과학적 관점으로 봐도 태아들은 일곱 달부터 듣고 느끼고 기억하기 시작한다.
일곱 수부터 모두가 의 열린 모음으로 시작하는 한국말도,
그리고 정말 열에서 열리는 자궁문도 절묘하다.
과학의 정밀성과는 또 다른 시의 정교함이다.
과학적 관점으로 봐도 태아들은 일곱 달부터 듣고 느끼고 기억하기 시작한다.
감각이 열리고 뇌가 발달한다.
이때 태명(胎名)을 계속 불러주거나 같은 음악을 되풀이 해 들려주면 태어난 뒤에도
산아들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한 개의 수정란에서 42사이클의 세포분열을 되풀이하면서 자라던 태아가
이 세상 밖으로 나온 뒤에는 겨우 5사이클로 줄어들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탄생 전에 우리 몸은 거의 다 만들어진 것이나 진배없다.
태아 의학이나 週産期學의 발달로 태내의 많은 신비가 풀어지면서
나이는 태아 때부터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요
과학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작은 일 같지만 이것이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 체계를 가르는 중요한 철학의 랜드마크다.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보는 차이가 바로 이 연령 계산법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최첨단 자기공명 기기라 할지라도 앞 못 보는 심 봉사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생명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은 렌즈도 수정체도 아니요 마음의 눈이기 때문이다.




(7)

 기저귀는 문화의 중요한 단서물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갓난 아이들은 용케 어머니의 젖꼭지를 찾아 빤다.
시각이 아니라 후각을 통해서다.
설마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이미 배 안에서부터 어머니 냄새를 맡아 왔다는 이야기다.
배 안에서도 어머니의 말을 익힌다는 말,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편안한 표정을 짓고 베토벤의 시끄러운 음악에는 얼굴을 찡그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냄새까지 맡는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신생아들에게 평소 사용하던 어머니의 브래지어와 그렇지 않은 것을 대주고
 그 반응을 살펴본 실험결과라고 하니 승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탯줄을 끊자마자 양수를 빨고 배설물을 싸던 생물유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배우고 익혀야 사는 사회로부터 오는 최초의 문화유전자가 기저귀를 타고 들어온다.
빠는 것과 싸는 것은 생물학적 유전자에 맡겨진 것이지만 먹는 것과 누는 것은 문화적 학습과 훈련에 의한 것이다.
한국 나이로 두세 살은 되어야 겨우 자기 의지로 배설을 가릴 수 있게 된다.
그동안에는 기저귀를 줄곧 차고 지낸다.
사람들의 일생을 기저귀(강보)로부터 시작하여 壽衣로 끝나는 한 폭의 천으로 파악한 것은 대문호 셰익스피어다.
하지만 기저귀의 문화인류학적 의미는 그보다도 훨씬 복잡하다.
같은 기저귀라도 자연섬유로 된 옛날의 기저귀와 종이로 만든 요즈음의 일회용 기저귀는 소재부터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천 조각 자체보다도 문화에 따라 아이에게 기저귀를 채우는 방식이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
우선 기저귀를 느슨하게 채우느냐 꽉 조이느냐의 문화적 풍습에서 민족성 형성에 차이가 생긴다는 이른바 기저귀學이란 것도 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다니엘 벨 같은 사회학자는 실제로 기저귀를 지나치게 꼭 죄는 풍습으로 러시아인의 기질과 사회성을 분석했던 기저귀학파를 비웃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웃어넘길 일은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기저귀를 채우듯 일본 사람들은 아이들의 다리에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꼭 조여 맨다.
일본인 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다카바시 에쓰지로).
일본인들은 머리에는 하치마키(머리띠), 어깨에는 다즈키(어깨띠), 양 가랑이 사이에는
훈도시(기저귀 모양의 천)를 조여야 힘이 나는 민족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일제 강점 하의 영향으로 우리도 허리띠어깨띠까지 두르고 데모를 하지만 일본의 훈도시만은 그들의 것이다.
힘 자랑하는 일본의 역사들이 발가벗은 채 기저귀만 차고 씨름판에 오르는 그 기상을 보면 그래 정말 기저귀의 문화유전자라는 게 만만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아이들을 업고 다니는 시대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어머니들은 기저귀도 포대기 끈도 느슨하게 매는 편인 것 같다.
업힌 아이들이 어깨라고 하기보다 엉덩이에 박처럼 매달려 있는 옛날 그립고 귀여운 삽화를 보면 알 것이다.
기저귀를 꽉 졸라매는 것은 文이요, 헐렁하게 매는 것은 質이다.
조이는 것도 느슨한 것도 아닌 채운 듯 만 듯한 그 가운데 것이 바로 유교에서 말하는 中庸인 文質彬彬이다.
한국인이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문화다.
기저귀를 조여 매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 동남아의 경우다.
아예 기저귀란 것이 없단다.
인도네시아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배설할 기미가 보이면 전광석화와 같은 타이밍으로 받아 씻어낸다고 한다.
기저귀 없는 문화권의 질이 생겨나는 순간이다.
그렇다.
기저귀는 문화의 중요한 단서물이다.
젖을 빠는 것과 대소변을 싸는 것의 인풋과 아웃풋이 먹는 것과 누는 것의 의지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저귀의 의미다.
한국인의 최초의 학습은 이렇게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을 배우는 맘마와 지지이고
자기 의지로 배설하는 것을 배우는 쉬이 쉬이와 끙가 유아 언어다.
빨고 싸던 생물학적 유전이 먹고 누는 문화유전자로 변하고 그것이 사회에 나가면 벌고 쓰는 관계로 진화한다.
그래서 버는 것만 알고 쓰는 것은 모르는 경제학경영학은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도 꽉 조인 기저귀를 말이다.


(8)

왜 아이들은 일어서는 모험을 자청하는가



콩나물 시루가 된 만원 엘리베이터 속에서 이따금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만약 인간이 다른 짐승들처럼 네 발로 돌아다닌다면 지금 이 엘리베이터는 어떻게 되었을까. 컨테이너처럼 길게 눕혀져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겠지.
사람들은 양 떼 모양처럼 아주 거북하고 민망한 자세로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웃음이 나오다가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인간의 직립 자세의 기원에 대한 프로이트 박사의 가설이 떠오른다.
그것은 항문과 생식기가 있는 엉덩이와 얼굴이 있는 머리 사이를 되도록 멀리 떨어뜨리기 위한 자세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이미 앞 글에서 기저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연 상태에서 인간적 문화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대소변 가리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결단코 프로이트 박사와 같은 산문적이고 건조한 상상력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내 기억을 비디오처럼 리와인딩하면 처음 일어서서 웃고 있는 한국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투부터가 다르다.
한국 사람들은 임신하는 것을 아이가 선다고 하지 않는가.
말의 이미지를 통해서 보면 한국의 아이들은 어머니 배 속으로 강아지처럼 기어 들어온 게 아니라 당당히 선 채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온 것이다.
실제로도 한국 애들은 엎어 재운 서양 아이들과는 다르다(엎어 재운 아이들이 질식사로 죽는 사고가 잇따르자 요즘 서양에서도 한국식으로 눕혀 재운다).
한국 애들은 누워 지내던 태에서 엎어지는 운동을 하고 다음에는 고개를 들고 누에 벌레처럼 배로 기어가는 단계에 이른다.
일 년 가까이 그런 과정을 제 힘과 의지로 자연스럽게 통과해야만 두 발로 일어서는 마지막 봉우리에 오르게 된다.
중력의 법칙에 따르면 엎드려 기어 다니는 이상으로 편한 자세는 없다.
이 세상 어떤 의자나 책상도 두 다리로 서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모험을 자청하는가.
더구나 한국의 장판은 양탄자가 깔린 서양이나 일본의 다다미 방과는 다르다.
한번 넘어지면 콘크리트 바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무릎을 찧고 머리를 부딪쳐 울면서도 다시 일어선다.
유난히 정이 많은 한국의 어머니 아버지들인데도 애가 일어나 걸음마를 배우는 순간만은
옆에 떨어져서 추임새만을 한다.
따로~ 따로~! 따로~외치면서 손뼉을 친다.
아이는 다시 일어섰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선다.
그러다가 보라, 이윽고 어느 날 아이는 제 발로 일어선다.
아직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눈에, 볼 위에, 입술 위에 은은하게 어리는 미소를 보았는가.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이 땅의 지평 위에 우뚝 선다.
한 일(一)자의 땅바닥 위에 사람 형상을 딴 큰 대(大)자를 세워 놓은 한자의 그 설 입(立)자처럼, 혹은 한 폭의 깃발처럼.
그런데 서양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최초로 일어선 순간의 감동을 잘 모른다.
라이스 유크리드라는 사람이 베이비 점퍼의 보행기를 만들어 특허(US 8478)를 낸 1851년부터의 일이다.
2002년 아일랜드의 매터병원에서 가레트 박사 팀이 190명의 부모를 상대로 조사한 보고서를 보면 이들 가운데 102명(54%)이 보행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 사용 기간은 중간치로 계산해 생후 26주에서 54주까지 반년 이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키고 빨리 일어나 걷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인데 실제로는 보통 애들보다도 오히려 서너 달 더 늦어진다는 조사 결과다.
거기에 보행기가 굴러 떨어지는 사고도 많이 발생하여 캐나다에서는 이미 십여 년부터 법으로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미국에서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 이유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제왕절개 수술로 탄생의 자유와 그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이번에도 일어서고자 하는 자율의 의지와 훈련이 보행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호사스러운 보행기 위에서 기기도 전에 먼저 걷는 우리 아이들도 이제는 서양 애들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언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는지 아이도 부모들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따로 따로 따로라는 전통적인 추임새의 말조차 모른다.
그것은 곧 첫발을 떼놓고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에 은은히 미소짓는 한국인의 모습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9)

업는 것과 업힌다는 것의 문화적 의미

일본의 한 소아보건학자는 아이를 업어 기르는 것은 일본과 미국의 인디언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일본 특유의 스킨십을 자랑하면서 아이들을 떼놓고 기르는 서양문화와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이를 업는 데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인들이 바로 이웃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본은 아이를 온부히모라고 부르는 띠로 매고 한국은 포대기로 두르는 그 차이밖에 없다
(아이를 업을 때 조여 매는 것과 느슨하게 두르는 것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기저귀를 논하는 자리에서 밝힌 바 있다).
서양 사람들은 아이들을 낳자마자 요람이나 아기 침대에 떼내어 따로 키운다.
이동할 때에도 유모차에 태워 끌고 다니기 때문에 모자의 스킨십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 대신 아이들은 일찍부터 독립된 한 인격체로서 성장하게 된다.
업은 사람의 뒤통수만 보이는 문화가 아니라 눈과 눈을 서로 마주 보는 소통력의 문화다.
문제는 업는 문화는 스킨십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를 업으면 두 손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부엌일바깥일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다.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업은 것조차 모르는 일체감이다.
포대기가 바로 요람이요 유모차이기에 애들은 어머니와 떨어질 걱정 없이 온종일 업혀 다닌다.
어깨너머로 요리하는 것, 세탁하는 것, 바느질하고 청소하는 어머니의 가사와 집안 구석구석을 다 구경한다.
나들이를 갈 때면 바깥 풍경은 물론이고 동네 아줌마의 얼굴과 목소리도 익힌다.
서양 애들이 요람에 누워서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 애들은 엄마의 등에 업혀 세상을 보고 듣는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미리 느끼고 배우는 현장 학습이다.
새 소리를 듣고, 꽃을 보고, 바람을 타고 오는 모든 생활의 냄새를 어머니의 땀내와 함께 맡는다.
캥거루 같은 유대류보다도 더 밀착된 상태에서 발육하는 아이들은 외로움을 모른다.
어깨너머 세상은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원리를 업고 업히는 상생원리로 바꿔놓는다.
한국의 어머니들도 서양 사람들처럼 아이들을 베이비 슬링(baby sling)으로 묶어 매달고 다니는 세상인데도
업는 문화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그대로 따라다닌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그 흔한 키스 신보다는 업어 주는 연기가 최고의 애정표현으로 꼽힌다.
이도령이 춘향이를 업어 주는 판소리 장면과 시차가 없다.
남녀의 경우라면 에로티시즘으로 볼 수도 있지만 국민 소설이 되어 버린 메밀꽃 필 무렵의 라스트 신을 보라.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얻은 동이의 등에 업혀 냇물을 건너는 허 생원의 그 행복 절정의 장면 말이다.
늙으신 어머니를 업고 너무나도 가벼워진 몸무게에 서너 발짝도 걷지 못했다는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노래에는 국경 없는 감동이 있다.
업고 업히는 문화는 개인 중심의 서구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한국인(동아시아) 특유의 집단 귀속의식으로 발전한다.
 윷놀이에서 말판 쓰는 것을 보면 상대방 말은 가차없이 잡아먹으면서도 자기 말들은 넉동산을 한꺼번에 업어 나간다.
그것이 윷놀이의 최고 전략이요 진미다.
업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업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잘 쓰는 어깨너머로 배운다는 말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업어 주고 업히는 문화를 숫자로 나타내면 어떤 수학공식에도 없는 1+1=1이 생겨난다.
누이의 어깨너머로 수틀을 보듯 세상을 보자는 아름다운 시 세계가 열린다.
아무리 추악한 세상이라도 따뜻한 체온이 흐른다.
하지만 내가 처음 홀로 일어서던 날 따로~따로~따로라고 추임새를 듣던 따로의 정신을 잃으면,
그 개별성과 그 독립정신을 키우지 않으면 업는 문화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자아는 의존주의로 빠지고 어깨너머로 본 풍경들은 부정확한 미신이 되고 만다.
공동체의 동질성은 넉동산을 함께 업어 나가는 연고주의와 집단이기주의로 변질될 것이다.


(10)


 돌잔치문화와 꿈

오랜만에 돌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색동옷과 복건을 쓴 돌잡이를 보면서 처음으로 거기 의젓하게 앉아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았다.
눈물이 흔해진 나이라 그런지 경사스러운 날에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했다.
색 바랜 사진 한 장. 그나마 전쟁으로 불타버린 내 돌 사진이 생각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 장례식에 가도 곡소리를 들을 수 없고 결혼식장에 가도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세상인데 돌잡이만은 옛날 모습처럼 돌상 앞에 앉아 있다.
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내려와 앉은 것 같은 돌상차림이 아닌가.
그래 나도 돌상 앞에 저렇게 앉아 있었겠지.
아주 작고 반짝이는 그 많은 것들, 이름은 몰랐지만 분명 그것은 붓이고 책이고 무지개 같은 활이었을 거야. 무한대의 기호 모양을 한 것은 장수를 한다는 무명 실타래고
진주알 같이 쌓여 있는 것은 만석꾼이 되라는 흰쌀이었을 것이다.
얼른 잡아! 저게 다 너의 꿈인 거야. 좋은 걸 골라 잡기만 하면 돼
누군가가 속삭인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고 현실 속에서 내 기억을 일깨워 주신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다.
네가 돌상에서 맨 먼저 잡은 건 붓이었단다.
그리고 낡고 헤어진 천자문 책을 집으려고 했지
그때의 말을 나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흡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미소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부귀영화의 쌀과 돈, 권력의 활을 잡지 않고 붓 한 자루 잡았던 나를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신 어머니, 남의 나라처럼 그냥 퍼스트 버스데이라고 부르지 않고 유별난 돌잡이 풍습을 만들어 준 나의 조국, 그런 어머니의 아들과 그런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돌날 붓을 잡은 나는 정말 평생을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왔고
칭기즈칸도 아인슈타인도 없는 땅에 태어났으면서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지금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있다.
잠시 흐려졌던 눈이 맑아지자 돌상 위에 놓인 낯선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건 컴퓨터 마우스 아닌가예 맞아요. 빌 게이츠가 되라고요
돌잡이 아빠는 IT 벤처회사의 간부사원이었다.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읽은 그는 변명을 하듯 말을 이었다.
요즘 마우스는 명함도 못 내지요.
박찬호가 뜨면 야구공, 박세리가 이길 땐 골프공이 오르지요.
뭐 사라 장이 한국에 와서 연주를 하면 장난감 바이올린까지 등장한답니다.
그런데 요새는 스케이트래요. 유나 킴, 아시잖아요. 김연아말이에요
어차피 책을 잡아도 판검사 되라고 법전일 테고 CEO 되라고 경영책일 텐데 무엇이면 어떠냐. 나처럼 붓을 잡지 않아도 세계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 되거라폰 카메라 같은 것으로 누군가 백 년 전부터 돌상을 찍었더라면 아마 한국인의 다양한 꿈 사전이, 시대를 읽는 욕망의 역사책이 생겨났을 것이다.
어느 화가가 말한 것처럼 한국의 밥상을 부감촬영하면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밥상의 테두리는 액자가 되고 오방색 음식 그릇들은 추상화가 된다.
더구나 돌상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꿈을 담은 물건들이니 우리 미래를 검색하는 데이터 베이스의 창처럼 눈부실 거다.
예나 지금이나 돌상 앞에 앉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래의 비전을 잡는 한국인의 모습,
그 시작 속에 우리 문화를 읽는 암호가 숨어 있다.
우리와 비슷한 일본의 돌잡이 풍속과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첫째는 상(床)문화다.
한국인의 일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돌상(床)에서 제상까지다.
그 사이에 초례청, 결혼상이 있고 환갑상이 있다.
그런데 일본은 상이 아니라 다다미방에 돌잔치의 물건을 진열한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돌상에 오를 수 없는 칼(사무라이의 칼잡이 문화)이나 주판(상인들 문화) 같은 것들이다.
둘째는 앉는 문화다.
상 앞에서는 서도 안 되고 누워도 안 된다.
한국의 좌식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앉아서 받는 돌상이다.
일본의 돌잡이들은 평생 먹을 양식을 상징하는 떡(잇쇼모찌)을 짊어지고 다다미 위의 돌차림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아이가 걸어가는 쪽 물건으로 미래를 점친다.
셋째는 잡는 문화다.
돌잡이는 꿈잡이다.
한국인은 꿈을 꾸지 않고 손으로 잡는다.
잼잼과 곤지곤지의 애들 놀이에서 쇠젓가락으로 콩알을 집는 손기술까지 모두가 돌잡이의 잡는 문화로 상징된다.
같은 젓가락 문화권이라고 해도 일본에는 돌잡이의 개념이 없다.
걷지 못하는 아이들은 돌떡(잇쇼모찌)을 발로 밟게 한다.


(11)



우리 아기 몇 살?

엄마가 물으면 아기는 어렵게 세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세~살이라고 말한다.
그냥 재롱으로 보이지만 실은 한국인이 되는 첫 관문의 시험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한국의 속담을 봐도 세 살은 인생의 시작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하필 세 살인가?
그 비밀은 공자님만이 아신다.
『논어』 양화편에는 공자님이 제자인 宰我로부터 질문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마디로 부모님의 삼년상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군자도 삼년상을 지내다 보면 일반 예법을 잊게 되고 음악 연주자도 삼년상을 치르고 나면 몸에 밴 음악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일 년이면 족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공자님의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어린애는 세상에 태어나서 삼 년이 지나야 겨우 부모의 품속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부모가 돌아가시면 이번에는 삼 년 동안 자신이 그 곁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재아인들 삼 년 동안 부모 품에 안겨 자라지 않았겠는가.
부모의 삼년상을 인륜적 시각에서라기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벌판을 뛰어다니는 망아지도 있고,
알에서 깨어 나오기 무섭게 하늘로 곧장 날아오르는 앨버트로스 같은 새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짐승과 달리 삼 년 동안 한순간도 부모의 도움 없이는 우는 것 말고는
고개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존재다.
속수무책 벌거숭이 미숙아로 이 세상에 떨어진 결함 원숭이가 인간이 된 것이라는
아르놀트 겔렌의 말이 거짓이 아니다.
그래서 2000년도 훨씬 이전, 삼년상의 쟁점이 바로 오늘의 三歲兒 교육의 이슈로
직결하게 된다.
그렇다고 세계의 모든 아이가 삼 년 동안 부모의 사랑 밑에 자라고 세계의 모든 사람이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는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도시대 때의 일본 어머니들은 가정형편이 곤궁하면 낳은 아이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을 아이를 신에게 되돌려 준다는 뜻으로 고가에시(子返し라고 불렀고
푸성귀를 솎아낸다는 뜻으로 마비키(間引き라고도 했다.
위험한 낙태보다는 낳아서 죽이는 편이 안전하다 하여 고가에시를 하는
비정한 어머니들도 있었다.
어미가 애를 목 졸라 죽이는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神社의 에마 그림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수전 핸리의 연구에 의하면 에도시대의 일본 농가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아이를 죽일 만큼은 곤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합리적인 가족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약간의 종교적인 뜻도 작용한 것 같다.
에도시대의 문화 감각으로는 애는 신이 내려보낸 것으로 일곱 살까지는 자기 애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거기에 식구가 늘어나면 동리 사람의 압력도 작용하여 고가에시는 사회풍습의 하나로
퍼지게 되었다.
유교가 들어오고 막부의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말이다.
하기야 위대한 로마시민들도 그랬다.
아내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전쟁터의 병사 하나가 남자애를 낳으면 훌륭하게 잘 기르고
여자애면 소쿠리에 담아 강물에 띄우라고 한 편지가 발견돼 당시의 자녀관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설사 죽이지 않는다 해도 옛날 미국인들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노예로 삼았다.
엥겔스의 이야기로는 서구에서 가족을 뜻하는 패밀리아는 원래 로마에서는
노예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골치 아픈 이야기들은 앞으로 수도 없이 듣게 될 테니까
여기에서는 그저 주걱으로 뺨을 때려도 밥풀을 떼어 먹을 수 있어 행복해했던
흥부네 식구가 모두 몇 명이 되었는지 맞혀보는 것으로 끝내기로 하자.
정답은 열두 명.
그렇게 많은 애들을 푸성귀처럼 솎아내는 마비키나 잘못 배달된 물건을 반송하듯
고가에시를 하지 않고 너 몇 살나 세~살 재미있게 재롱 떨며 사람으로 키운
흥부의 이름을 잘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것이 저출산 시대에 더욱 그리워지는 우리 한국의 아버지요, 어머니의 옛 얼굴이었으니까. 혼자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 밑에서 3년은 보호받아야 인간이 되는 이 늦깎이 생물은 이천수백 년 전 공자의 시대와 달라진 게 없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공자처럼 삼년상을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변화요 진화라고 부르는 인간 문명의 역사라는 거다.


*******이하는 3월20일 아침에 올린글입니다.*******

耳鼻咽喉과 병원에 가서이가 아파서 왔는데요라고 말해 보라.
간호사는 틀림없이 여기 치과 아녜요라고 할 것이다.
간판에는 귀를 이(耳)라고 써놓았는데 말이다.
역시 안과(眼科)에 가서 안(眼)이 거북해서 왔다고 하면 내과로 가라고 할 것이고  목(目)이 아파서 왔다고 하면 인후과로 가라고 할 것이다.
그동안 한자말을 그렇게 많이 써왔는데도 역시 한국인은 세 살 때 배운 한국말로 해야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일상어의 반 이상(55.31%)이 한자말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사용 빈도가 높은 백 개의 말 가운데 한자어는 고작 16개밖에 안 된다는 통계다.
내 몸부터 살펴보라.
눈코입귀목손발배 등 모두가 단음절로 된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이다.
한자 바이러스를 막는 면역체가 내 몸 안에 있었다는 증거다.
같은 한자문화권인데도 일본 사람들은 동해(도우카이)를 통째로 한자말에 넘겨주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말끝에 끝내 토박이말을 붙여 동해바다라고 불렀다.
한두 개라면 틀린 말이라고 하겠지만 초가집, 처갓집, 역전앞, 황토흙,
거기에 일본말에서 온 모찌떡영어의 빵떡에 라인 선상의 영한(英漢)까지 겹친 말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천지인 三才처럼 인체어도 머리허리다리의 리자 돌림의 삼원구조로 되어 있고  머리에서 갈라진 머리카락, 손에서 갈라진 손가락, 그리고 발에서 갈라진 발가락의 파생어까지도 절묘한 삼분구조다.

제각기 따로 노는 영어의 헤어핑거토우와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세 살 때 몸에 밴 토박이말들은 배꼽 힘이 들어 있어 강하다.
최근 발견된 정조대왕의 어찰에서도 뒤죽박죽이란 말만은 한글로 적혀 있지 않던가. 김삿갓 역시 물속에서 노는 고기 떼들을 어쩌지 못하고 수물수물이라는 토박이 의태어를  한자음을 빌려水物水物이라고 묘사했다.

동양에서는 음양사상이, 서양(희랍)에서는 수성설(水成說)과 화성설(火成說-탈레스와 엠페도클레스가 두 원류다)이 물과 불로 철학의 기간을 삼아 왔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한국말의 물과 불처럼 대칭관계를 이루고 있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앞 글에서 설명한 대로 아빠와 엄마 그리고 서구의 파파와 마마의 유아 언어처럼 한국어의 물과 불은 선명한 M()/ P() 대응의 짝을 이루고 있다.
아버지는 불이고 어머니는 물이다.
그리고 물은 맑다고 하고 불은 밝다고 한다.
글자 모양까지 대비를 이루어 물에 뿔 난 것이 불이다.
그 자리에서 짜맞추기라도 한 듯이 물불은 절묘한 세트로 접합돼 있다.
한국말처럼 음과 양의 모음조화로 이룬 의성어 체계,  머리허리다리처럼 삼분관계로 구조화한 신체어, 거기에 물불처럼 선명한 이항관계를 나타낸 말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물과 불은 분명히 상극한다.
물은 차갑고 불은 뜨겁다.
물은 하강하고 불은 거꾸로 상승한다.
그런데 물의 영혼은 반대로 김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고 불의 영혼은 재가 되어
거꾸로 땅속에 묻힌다.
그런데 이렇게 대립하고 갈등하던 물불이 조왕님이 계신 부엌에 들어오면
놀라운 조화의 힘으로 밥을 짓고 국과 찌개를 끓인다.
불과 물이 같이 있으면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일방적인 믿음 때문에
지구 온난화의 재앙을 일으킨 것과는 다른 현상이 벌어진다.
상극은 상생으로 변해 날것도 아니요 탄 것도 아닌 맛있는 문명의 밥상이 차려진다.
한마디로 세 살 버릇은 물불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철이 들지 못한 사람을 일러물불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30년 전에는 물불 모르는 사회주의가 베를린 장벽과 함께 붕괴하는 것을 보았고
오늘날에는 과욕과 탐욕의 물불 모르는 자본주의가 리먼브러더스와 함께 물벼락을 맞는 광경을 보았다.

겸허한 마음으로 백두산에 올라 외쳐라.

한민족을 향해, 세계를 향해서 크게 외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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