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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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글쓴이: 데이빗lee  |  등록일: 05.25.2023 08:44:19  |  조회수: 809
어린시절 내가 살던 동네 에서 서울 역 쪽의 하늘을 바라 보면,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
그리고 손수레에 가득짐을 싣고,또 지게에 짐싣고, 더러는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다니는 풍경들이 보였었다.
소달구지가 서울 서부역에서 수화물 을 싣고 아현동과 충정로 3가로 가는길엔
늘 가슴아픈 풍경들 이 보였다.
흰색 바지 저고리가 빛이 바래고 땀에 절어,
누런빛으로 변한 그런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지게를 지고,언덕길 을 오르내리던 모습을 흔히 볼수 있었다.
그리고
가득 짐을싣고 안깐힘 을 써도 언덕길 을 오르기가 힘겨워
채찍질 당하면서도 지쳐 움직이지 못하는 착한 소의 눈을 보고는 몰래 집으로 가서 울기도 했었던 어린시절의 중림동.

동네 어른들이 그 고개를, 춘향이 고개라고 불렀던것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도령과 춘향이의 이별만큼이나 애틋한 사연이 있었던곳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과  함께 우물둥지로 들어서는 길 입구에 있던 몇그루의 나무가
춘양목 이었는지...그것이 춘양목 고개,
춘양이고개 에서 춘향이 고개로 와전 된것이 아닌가 추측 을 해 보지만 아무리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길이 묘연 하기만 하다.

그길은
학교에 가는 유일한 길 이었다.
학교 가는길에,
손수레를 끌고 힘겹게 고갯길을 오르는 아저씨를 두고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서,
고사리같은 손으로 수레를 밀어주다가 학교에 늦은적도 있었다.

길가엔 조그만 점방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좌우로는 선술집들 이 보였다.그리고 밤이면
간간히 붉은등을 켠 주점들 이 있었다.
얼굴마다 곱게 화장 을 한 아줌마들 이 주전자에 술을 담아 분주히 다니는 것을 보면서 무심히 지나쳤을뿐
그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였었다.
학교를 다니고 글 을 알게되면서
주점의 문 마다 왕대포라고 쓰여있는것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궁금하여 당돌 하게도 문을열고 들어가 대포는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밤이면 여기저기서 돼지갈비 를 굽고,빈대떡 을 부치는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 하였고,
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길을 지나 다니시던 아저씨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장단맞춰 젓가락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아현동 으로 향하는 길 왼편에는
전쟁당시 폭격으로 무너진 집터 
위에 판자로 허술하게 지은 공장 같은곳이 있었는데 그곳 에서는 늘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곤 했었다.나중에 "국희"라는 드라마를 보고나서야 그곳이 크라운제과 의 최초 공장 이었다는 사실을 알수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숙제를 마치면 졸음이 밀려와 방 한쪽 귀퉁이에서 잠이들곤 했었는데,
엄마는 나를 끌어다 무릎에 머리를 베개하시고 어두운 백열등 밑에서 바느질을 했었다.
형님들과 내가 학교에 다녀오면 옷가지와 양말들을 손빨래 하여 아랫목에 말리시고 구멍난 양말들을 꿰매고 잘 개어서 바구니 에 담아 두셨던것이다.

그당시의 양말은 웬 구멍이 그리도 자주 났었는지 이곳을 꿰매면 그옆에 구멍이 났고 또 그옆으로 구멍이 나면 나중에는 커다란 천조각 을 덧대어 기워 발바닥 부분은 커다란 다른색의 양말이 되어있었다.

한번은 짝궁 이었던 박창환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아서 갔었던적 이 있었다.그친구가 살던 북아현동은 부유한 일본인들 이 지었던 저택들이 있었던 부촌 이었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잘 꾸며진 정원이 보였고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서니 친구의 엄마와 두분의 도우미들께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또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려 하는순간 천을대고 기운 양말이 몹씨 부끄럽게 느껴지는것 이었다.
그것도 색깔이 다른 천으로 덧대어 기워진 양말 이었으니,
내딴에는 그것을 감춰보리라 하고는 밥상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곧 친구의 엄마가 양손에 음식을 들고 들어와 내 앞을 지나시려다 굳이 뒷쪽으로 지나가시겠다고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그리고 다시 방문을 나가셨는데 잠시후 나를 밖으로 불러내셨다.거실에 나가보니 친구의 엄마는 새양말 하나를 내게 건네주셨다.
꿈에도 그리던 구멍나지 않은 새양말이 내손에 쥐어졌지만 나는 그양말을 신을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채 양말을 들여다 보다가 그것을 정중히 거절하여 돌려드리고 돌아 서려는데 친구의 엄마는 그 이유를 물으셨다.
나는 모기만한소리로 "엄마가 속상해 하실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려 무슨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
맛은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할수없는 그런지경이 되어있었다.

가끔씩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자다가 깨어나기도 했었지만 나는 그냥 눈을감고 그행복을 만끽했었다.
그리고 바느질을 하시며 아버지와 북쪽 고향의 얘기와 피난 길에서 고생했던 일들의 이야기들을 밤 늦도록 하시는것을,
온갖 상상으로 떠올리며 듣곤 했었다.

그곳이 오늘날엔 서울시 중구로 편입 되었지만 그당시엔 서대문구에 속해 있었다.
서대문구 중림동 256번지.
지금도 그집이 남아 있을지 알수 없으나,미국으로 오기전 2000년도 당시에는 분명히 존재했던것으로 기억 된다.
약초가 많이 난다하여 약현골 이라 불려졌었던 중림동.
내 그리운 고향.

가도 가도 십 리 (十里)밖에 있다고 했던가.

산을 넘어
가도
가도
또 십 리 밖.

갈수없는 나라,
내 고향이여.

2023년 2월 18일 이남철


이글을 쓰고
구글맵으로 중림동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는것을 보는 순간부터 지우개로 지우듯 저의 기억이 지워지고있다는 느낌이 들어 서글퍼지는 이 아침  입니다.
저는 얼마나 더
그때의 기억을 간직할수 있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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