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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로 '양김시대' 종언

주형석 기자 입력 11.21.2015 05:30 PM 조회 3,043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로 한국 현대정치를 양분해 이끌어왔던 김대중·김영삼으로 상징되던 '양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 어머니 박부연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영삼 前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돼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김영삼 前대통령은 제 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통산 9번 당선된 9선 의원이었다.

6.10 민주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하에서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김영삼 前대통령은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김영삼 前대통령은 이후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김대중前대통령의 평화민주당보다 의석수가 적은 3당이 되자 민주정의당ㆍ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성사시키며 야당에서 하루 아침에 전격 여당으로 변신했다.

3당합당으로 탄생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말을 하며 합류해, 박철언 전 의원 등 민정계와의 사활을 건 대결 끝에 결국 거대 여당의 대선후보자리를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김영삼 前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서 거대 여당 후보로 나서 필생의 라이벌 김대중 야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군정 종식'을 이뤄내며 '문민시대'를 열었다.

김영삼 前대통령은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 다섯 차례를 역임하며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전두환 두 군사정권에 맞서며 민주화에 기여했다.

양김 세력을 상징하는 '상도동·동교동'은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서 박정희前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다 1979년 총재 직무 강제 정지와 의원직 제명 등의 고초를 겪었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들어서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지속적으로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6월 항쟁' 주도 등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이끌며 군사정권 기반 약화와 직선제 개헌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김영삼 前대통령은 평생 민주화 투쟁과 인권 증진의 길을 걸으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자신의 신조처럼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체제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재임 기간 '칼국수'로 상징되는 검소함과 청렴함을 표방하면서 하나회 청산과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실시,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을 통해 사회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 친인척 비리와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부도 사태, 이른바 ‘IMF 사태’를 초래하며 경제를 어렵게 만들어 임기 초반 누렸던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대부분 상실했다.

또한 김대중 前대통령의 호남지역을 포위한 '3당합당'은 결과적으로 지역감정을 절정으로 이끌어 고착화시켜 지금의 분열적 정치 행태를 만든 시작으로 분석된다.

또 상도동으로 대변되는 '가신정치'도 부정적 유산으로 기억된다.

김영삼 前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PK(부산·경남)를 지역 기반으로 삼은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로서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평생 거르지 않다시피한 새벽 조깅과 영문이니셜 애칭 'YS'는 김영삼 前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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