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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을 벗어나기 위한 현대차의 몸부림

대한민국 대표 자동차 회사의 시작과 성공, 그리고 실패에 관한 모든 것

북미와 유럽 수출 가능성 타진

‘수출만이 살 길이다.’ 포니의 성공에 고무된 현대자동차 정세영 사장의 다음 목표였다. 역시나 반대는 내부에서 먼저 나왔다. 윤주원 전무는 “토요타도 중역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으로 크라운을 수출했다가 품질문제로 고작 5대 팔고 발을 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 사장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수출 아니고선 ‘규모의 경제’를 이룰 방법이 없었던 까닭이다. 당시 무려 62개국이 포니 수입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사내 반대로 일단 자동차를 생산하지 않던 남미나 중동 중 한두 나라에 수출하기로 절충했다. 첫 수출국은 에콰도르로, 1976년 7월 포니 5대를 실어 보냈다. 20년이 지난 1996년, 현대차는 당시 수출했던 포니 중 한 대를 박물관에 쓸 목적으로 에콰도르에서 다시 사왔다. 150만㎞ 이상 뛴 택시였다.

한편, 현대차는 수출을 위해 미국의 올슨 엔지니어링이란 회사에 포니를 보냈다. 미연방 안전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2년 동안 35개 항목의 안전도와 배기가스 규제치, 소음기준치 등을 보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기상조였다. 배기가스 규제를 맞추자니 연비가 떨어지고 가격이 치솟아 경제성이 떨어졌다. 이번엔 포니 12대를 비행기에 실어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안전규정 테스트 기관 ‘마이라(MIRA)’로 보냈다. 배기가스 규제가 국내와 비슷한 유럽 진출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당시 국내엔 제대로 된 주행시험장이 없었다. 영국의 시험 항목은 다양하고 까다로웠다. 결과가 나올 때까진 어떤 예상도 불가능했다. 다행히 포니는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극한의 환경에서 드러난 품질문제

안타깝게도 중동에선 그렇지 못했다. 현대차는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113대를 시작으로, 바레인과 요르단, 예멘 등지에 연간 2,000~3,000대의 포니를 수출했다. 그런데 기상천외한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령 운전대와 글러브박스가 동그랗게 말렸다. 시트는 오그라들면서 터졌고, 강렬한 자외선에 검정 색소가 날아가 빨강으로 변하기도 했다. 정세영 사장은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는 와중에 해외시장의 동향과 여건을 파악하고자 했다. 자국 내에서 자동차를 생산하지 않으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 전후인 22개국이 대상이었다. 정 사장을 포함해 3개 조로 나눈 조사팀은 1976년 한 해 동안 시장조사에 나섰다. 한 국가에서 2~3일씩 보내며 한 번 출장에 10여 국을 도는 강행군이었다.

전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 덕분에 수출 대상국과 규모는 나날이 늘었다. 1976년만 해도 20여 개국, 1,019대, 257만 달러였다. 반면 1979년엔 1만98,204대, 5,655만 달러로 20배 가까이 성장했다. 같은 기간 동안 스위스 제네바, 독일 프랑크푸르트,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에서 치르는 세계적 모터쇼에도 부지런히 참가했다. 포니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1978년 2월, 포니는 국내 단일 차종 중 처음 5만 대 생산을 기록했다. 같은 해 12월엔 10만 대를 돌파했다. 1982년 포니는 둥근 맛을 살려 디자인한 포니Ⅱ로 거듭났다. 1983년엔 캐나다 수출용 범퍼를 단 포니Ⅱ CX로 가지치기했다. 1984년, 포니Ⅱ는 캐나다 시장에서 수입차 1위를 기록한다. 현대차는 1990년까지 포니 시리즈를 66만1,510대 팔았다.

포드의 그라나다, 현대의 스텔라

현대차는 포니 위급 차종도 신경 써야 했다. 1977년 3월, 뉴 코티나의 후속으로 마크Ⅳ를 선보였다. 대우가 인수한 새한은 이듬해 뉴 레코드로 맞불을 놨다. 현대는 고급차 시장의 수요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1978년 11월, 현대차는 독일 포드와 기술제휴로 그라나다 V6을 내놓았다. 20M 이후 5년간 공백을 깬 현대차의 최고급 세단이었다. 그라나다는 당시 국산차 중 가장 컸다. 엔진은 V6 1,933㏄로 102마력을 냈다. 또한, 파워스티어링, 충격흡수식 스티어링 칼럼, 네 바퀴 독립 서스펜션, 2중 안전유리(앞), 할로겐 헤드램프, 헤드램프 워셔, 앞좌석 머리받침 등 당시엔 흔치 않은 고급 장비를 욕심껏 챙겼다. 1985년 12월, 그라나다는 반년 후 나올 그랜저에게 바통을 넘기고 사라졌다.

현대차는 1970년대 말부터 새 중형세단 개발을 시작했다. 4년 동안 270억 원을 들여 완성한 스텔라가 주인공으로, 코티나 마크Ⅴ의 뒤를 이었다. 디자인은 포니의 산파, 주지아로가 맡았다. 스텔라는 라틴어 ‘Stellaris’에 뿌리를 둔 이름으로, ‘별’ 또는 ‘우수한’ 등의 뜻을 품었다. 스텔라의 길이와 너비, 높이는 4,416×1,716×1,382㎜로, 코티나보다 컸다.

엔진은 직렬 4기통 1.4L와 1.6L를 얹다가 나중에 1.5L 100마력으로 통일했다. 스텔라는 넉넉한 차체와 저렴한 유지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화재가 잇따르면서 1만5,000대를 거둬들여 배터리 배선 바꾸는 홍역을 치렀다. 1985년 1월, 스텔라는 포니에 이어 두 번째로 캐나다 수출 길에 올랐다. 1985년엔 스텔라의 최고급 트림으로 소나타가 나왔다.

가까스로 확보한 앞바퀴 굴림 기술

한편, 1970년대 말 전 세계 자동차 업계는 굴림방식을 기존 뒷바퀴에서 앞바퀴로 바꾸는 추세였다. 미끄러운 노면에서의 등판능력과 실내공간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현대차에겐 생소한 분야였다. 그래서 포니 파워트레인으로 인연을 맺은 미쓰비시와 접촉했다. 그러나 거절당한다. 1978년 초, 폭스바겐이 제 발로 현대차를 찾아왔다. 당시 폭스바겐은 아시아 생산거점을 찾고 있었다. 처음 요구는 단순했다. “연간 폭스바겐 엠블럼을 단 차 5,000대만 팔아주면 앞바퀴 굴림 엔진 기술을 주겠소.” 하지만 점차 조건은 늘어났다. 절반의 지분을 요구하더니 급기야 현대자동차서비스를 통합하라고 요구했다. 유럽에 수출할 경우 한 대 당 500달러의 로열티도 원했다. 협상은 1년 만에 결렬되었다.

이번엔 프랑스의 르노를 만났다. 르노는 연간 20만 대씩 5년간 100만 대 판매 기준으로, 1억8,000만 달러의 기술료를 요구했다. 현대차에겐 너무 큰 부담이었다. 이후 현대차는 이태리의 알파로메오, 미국의 포드와 차례로 만났다. 거의 ‘구걸’에 가까웠다. 이 과정에서 자체 기술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정세영 사장은 곧장 기술연구소 설립을 지시했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현대차는 다시 미쓰비시의 문을 두드린다. 미쓰비시 내엔 두 가지 주장이 대립했다. 
1) 지금 기술을 주면 나중에 커서 우리를 위협한다. 2) 어차피 누군가와는 손을 잡을 테니 차라리 우리가 주자. 결국 미쓰비시는 전륜구동 엔진 기술을 주기로 한다. 대신 미쓰비시 자동차와 미쓰비시 상사 몫으로 10%씩 총 20%의 주식을 요구했다.

진정한 기술독립을 위한 고난의 여정

자동차 공장엔 수많은 기계가 들어간다. 공작기계라고 하는데, 크게 선반이나 드릴 같은 범용기와 엔진 제작 등 특정 목적의 전용기로 나뉜다. 범용기는 어떻게든 만들어 썼지만, 전용기는 거의 수입에 의존했다. 정세영 사장은 장기적으로 30만 대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공작기계를 스스로 개발하고 제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1978년 2월 1일, 현대차는 공작기계사업부를 발족하고 미쓰비시 중공업 등 일본 기업들과 기술제휴 협정을 맺었다. 1980년 3월, 공작기계 공장을 완공하고 9월엔 일본으로 처음 수출했다. 시행착오도 수없이 겪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정 사장의 설득에 협력업체들도 동참했다. 기술을 확보하고 나니 설령 수입하더라도 바가지 쓸 일이 없었다.

1982년 3월 2일, 현대차는 미쓰비시와 정식계약을 맺었다. 이제 30만 대 규모의 공장을 세울 차례였다. 당시 현대차의 생산규모는 15만여 대. 정세영 사장은 연구소 설립도 밀어붙였다. 엔진과 변속기를 자체개발하지 않고선, 기술독립의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1984년 11월, 현대차는 경기 용인의 마북리에 연구소를 준공했다. 현대차는 울산시 태화강 인근 부지를 사서 종합 주행시험장 건설에도 나섰다. 1983년 12월, 24만평 부지에 20㎞의 주행시험로를 포함한 시설을 완성했다. 이듬해엔 충돌시험장과 시험 연구실 건물도 지었다. 1985년 2월 6일, 마침내 30만 대 공장이 준공식을 치렀다. 같은 날, 현대차는 전륜구동 기술로 개발한 X카 프로젝트의 결실도 공개했다.

<출처 : Daum자동차>